순천광장신문은 협동조합이 만든 신문이다. 조합원들이 우리 주변의 사람들을 소개하고, 생활 주변의 이야기를 담을 때 협동조합 언론으로서 그 가치와 의미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그 과정이 곧 순천지역의 다양한 사람들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를 따뜻하게 할 것으로 보고‘IN 순천, 순천인’을 기획한다.

설날이 다가오면 동짓날부터 목이 메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만 느껴졌다. 고향 냄새! 해 질 녘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저녁연기가 그리웠다. 서울에서 출발하면 12시간을 채워야 순천에 도착하는 완행열차였지만, 그 기차를 탔다는 것만으로 행복했다. 그리고 도착했다. 어머니의 집!

▲ 김순중 씨(순천시 매곡동. 63세/ ⃝⃝아파트 경비원) 아직은 건강하니 일을 더 해야 한다. 이 나이에도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서 감사하다. 내가 일하는 곳이 쾌적한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작은 일이라도 기쁘게 하려 한다.

김순중(순천시 매곡동, 63세) 씨는 순천에서 스물여섯 번째 설을 맞이했다. 나머지 설은 어디서 채웠을까?

순천시 매곡동이 고향인 순중 씨는 7남매 중 여섯째였다. 막내둥이로 귀염만 받던 열일곱의 어린 나이로 일자리를 찾아 친구들과 함께 상경했다. 그때가 1973년이었다. 양복점에서 잠시 일했던 경험 덕분에 바느질 일이 많은 평화시장에서 미싱사로 일을 시작했다. 허름한 일본식 목조건물에서 밤낮없이 바느질을 했다. 그 당시 미싱사들은 시급을 받지 않고 완성한 옷 한 벌에 수당이 정해져 있어서 기술이 빠르고 좋을수록 벌 수 있는 돈이 달랐다. 아침 9시부터 밤 9시까지 밥 먹는 시간만 빼고 일했었다. 꽃이 피고 지는 것도 모르고 오직 미싱만 돌린 것 같다. 처음에는 와이셔츠와 잠바를 바느질하다가 육군본부 앞으로 공장을 옮긴 후로 주로 경찰복과 군복을 만들었다. 

6개월 동안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한 적도 있었다. 많이 만들면 하루에 상의는 10벌, 바지는 15벌 정도 만들 수 있었으니 인근에서 기술 좋다고 주문이 많았었다. 어느 날 남영동 대공 분실에서 호출이 왔다. ‘바느질만 하는 미싱사를 서슬이 퍼런 남영동에서 왜 찾을까?’ 하고 겁이 났었는데 별이 두어 개 있는 장군이 자기 옷을 만들어 달라며 직접 치수를 재기 위해 부른 것이었다. 최근에 ‘1987’ 영화를 보았는데 그때 남영동이 문득 떠올랐다. 얼마나 긴장했었던지.

일하는 재미에 빠져서 몸 관리를 잘 하지 못해 결핵을 앓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다 같이 가난하고 힘든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나 혼자만의 고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설이 다가오면 밤새도록 줄을 서서 입석 표를 겨우 샀다. 내려오는 콩나물시루 같은 객차에 그나마 미처 타지 못한 귀성객들은 기관차에 매달려서도 탔었다. 기차는 요즘처럼 난방 시설이 전혀 없었다. 어느 겨울에 대전을 지나오는데 너무 추워서 떨다가 몇몇 사람이 어디서 구했는지 낡은 드럼통에 신문지를 모아 모닥불을 피웠다. 객실에서 모닥불이라니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일이지만 그때는 그렇게라도 몸을 녹일 수 있어서 좋았다. 고향에 오는 길이라 좋았다.
 

▲ 순중 씨는 주일에는 교회에 간다. 성가대에서 연습하고 지인들을 만나는 재미로 한주를 보낸다. 아내와는 각자 다른 교회에 출석하는데 아내의 뜻을 존중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순중 씨가 잊지 못하는 순천은 무엇이었을까?
1960년대에 대 홍수로 많은 이재민이 발생했다. 나라에서 동외동 인근에 ‘성남 A, B, C지구’를 만들어 이재민들이 거주하게 해주었었다. 친구들과 C지구에서 해지도록 놀러 다니다가 어머니께 지천을 듣기도 했었다. 지금 석현동 건강문화센터 자리에 원래 미군 부대가 있었고 그 옆 동천 자락에 작은 비행장이 있었다. 매일 오전에 신문을 싣고 오는 비행기가 있었는데 친구들과 제방에서 하염없이 비행기를 기다리던 일이 지금도 생각난다. 이·착륙할 때 비행기 꼬리를 친구들과 막 쫓아가고 하늘로 올라간 비행기가 개미보다 작아질 때까지 바라보곤 했었다.

날아가 버린 비행기!
고향도 그렇게 멀어졌다.

명절이 끝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가는 길은 왜 그리 답답했던지! 왜 내려올 때 삐걱대던 완행열차가 올라갈 때는 고장도 없이 잘 달리는지? 향수병은 갈수록 심해지고 서울이 싫어졌다. 결혼하고 아이들(1남 1여)이 생긴 후 아내와 상의 끝에 순천으로 내려왔다. 완행열차 타고 상경한 열일곱 살 어린 소년이 20년이 지나 귀향한 것이다. 
 

▲ 30년 경력의 솜씨면 수선집이 잘 될 줄 알았는데 요즘은 기계화에 세탁이 밀리고 옷을 수선해서 입는 사람들이 줄어들어 세탁소 일도 힘들다고 한다.


신도시개발이 한창이던 92년에 조례동에 터를 잡고 세탁소를 개업했다. 바느질만큼은 자신이 있었고 목이 좋아서 한 자리에서 16년 동안 잘 운영했다. 그곳에서 미싱 하나로 아이들도 키우고 집도 장만하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았으니 고마운 친구다. 세탁소 자리에 병원이 생겨서 16년 만에 가게를 정리했다. 

지금은 금당의 어느 아파트에서 경비원으로 일하고 있다. 가게를 정리할 즈음 미싱을 없애려 했는데 아내가 평생 같이 살아온 것을 어찌 쉽게 없애려 하냐고 팔아도 큰돈 되는 거 아니면 그냥 놔두자고 했다. 그래서 지금도 집 한쪽 구석에 미싱이 그대로 있다. 가끔 그 녀석을 보면 “너도 참 고생 많았구나.” 라고 말해준다.

그렇게 올해 스물여섯 번째 설을 순천에서 보냈다.
이제는 비행장도 성남 C지구도 없어졌지만 가족과 친구들이 있다.
연휴가 끝나자 이제는 아들이 기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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