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지역의 영어교사가 주축이 된 9명이 히말라야 산맥의 안나푸르나 지역을 여행하고 돌아왔다. 모두 인생의 여정을 상당히 걸어온 사람들이다. 인문적 여행을 꿈꾸며 스스로 경로를 기획하고 여행일정도 잡는 등 여행의 전 과정을 즐기는 트래킹을 하고 왔다. 그들의 꿈같았던 8박9일의 여행기를 3회에 거쳐 싣는다. <편집자 주>

여행기는 자서전만큼이나 주관적이다. 자기 체험을 진실하게 기록하겠지만 객관적이지 않다. 여행기란 낯선 문화에 대한 주관적 느낌을 서술하는 것이기에 오히려 주관성이 여행기의 생명일 수도 있다. 그래서 영국의 수상이자 소설가였던 벤자민 디즈렐리는 “위대한 여행자들은 자기가 기억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자기가 본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기억한다.”라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을까? 그리고 이 여행기는 집단창작임을 미리 밝힌다. 참가자들은 전남동부지역 중등영어교사들과 농부, 동양서화연구가, 은퇴교사 등 총 9명이며, 선입견을 버리고 평등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별칭을 사용하였다.

· 목적: 네팔 ABC(Annapruna Base Camp) 트래킹, 카투만두 여행
· 기간: 2018.1.18. - 2.1. (산행 8박 9일, 관광 1박 2일, 이동 4일)
· 참가자: 9인(별칭: 배대장, 달림이, 비비, 빛별, 섬주, 섬진강, 써니, 태이, 화이트)
 

▲ 비행기 창밖으로 비친 히말라야


♬ 레쌈 삐리리 레쌈 삐리리 우레러 저우끼 다라마 번쟝 레썸 삐리리 
우레러 저우끼 다라마 번쟝 레썸 삐리리 ♪

(바람결에 펄럭이는 비단처럼 내 마음 두근두근거려요
날아가는 것이 좋을지 언덕위에 앉는 게 좋을지 모르겠어요)


설레임과 걱정의 준비 과정
우리는 일반적인 관광과 다른 도전적인 계획을 세웠고, 날이 갈수록 우리만의 여행을 만들어 갔다. 우리의 목표는 푼힐전망대를 거쳐 ABC(Annapruna Base Camp, 정확히 말하면 전문등반인들이 안나프르나 남봉(南峯)을 등정하기 위해 베이스 캠프를 치는 곳, 4130M)를 찍고 수도 카트만두에서 대표적인 힌두사원과 불교사원 등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우리는 여행 중 네팔인과 세계 각국의 트랙커(특히 1월에 집중적으로 많다는 한국인)들과 대화를 했고 그들과 정을 나누었으며 그들의 삶과 살림살이를 이해하려 했다. 어쨌거나 등산 경험이라고는 해발 2000M 정도의 지리산이나 한라산을 힘들게 올랐던 기억밖에 없는 우리가 히말라야라는 이름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준비해야 좋을지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용절감과 인문학적 여행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위해 전문여행사에 의존하지 않았다. 두 달 동안 나름 꼼꼼하게 준비를 했지만 너무나 많은 정보는 결정을 어렵게 했다. 책마다 온라인마다 사람마다 하는 말이 달랐다. 하지만 대체로 사전 체력 훈련과 고산병과 추위에 대한 대비가 필요하다는데 합의하고 네 번의 합동산행을 하고 장비를 사전 점검하였다. 가장 연장자인 화이트는 후배들에게 누가 되지 않을까 하여 일부러 무거운 책을 배낭에 담고 봉화산 둘레길을 여러 차례 혼자서 걸었다. 그 덕분인지 일흔의 나이에도 걷는 데는 아무 어려움이 없었다. 가장 어렵고 복잡한 항공권 구매와 숙소 예약, 일정 조정, 포터 예약 등은 배대장이 맡았다. 간식부터 매연 대비 마스크에 이르기까지 공동물품과 개인물품 구입에도 많은 에너지와 예상 밖 비용이 들어 ‘이 대신 잇몸으로’ 정신으로 출발하였다.

준비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부분은 팀워크 형성이었다. 친구끼리 여행 갔다가 ‘원수’가 되어 돌아온다는 말이 있다. 여행이란 해방감을 주고 많은 시간과 경비에 대한 보상심리가 작용하여 그만큼 안전에 취약한 상황이 발생하기 쉽다. 그래서 몇 가지 공동의 약속을 정하였고, 대장, 기획, 의무, 사진, 회계 등 역할을 나누었으며 나중에 식단정하기, 체조 담당 등이 자연스럽게 추가되었다. ‘대장’이라는 호칭은 보이지 않게 우리들뿐만 아니라 동반하는 포터들에게도 일정한 힘과 권위를 보였을 것이다.

인천 - 청뚜우 - 카투만두 - 포카라 입성
각자 짐을 최소화하자는 약속에도 불구하고 인천공항에 쌓인 우리들의 짐은 예상보다 컸다. 간식이나 핫팩 등 공동물품에다가 네팔인들에게 전해 줄 헌옷, 헌책 등이 부담되었다. 더구나 한인식당의 요청으로 14kg들이 된장과 고추장 두 통 때문에 검색대에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였다. 우리는 다시 캐리어를 풀어 헤쳐 몇 번씩 저울질을 해가며 겨우 짐을 부쳤다. 더욱이 직항노선 대신 중국 청뚜우(成都) 공항을 거쳐 가는 저렴한 에어차이나를 이용한 까닭에 시간과 수고는 배가 되었다. 수하물 찾아서 걸어서 10분 거리인 국내공항 3층 사무실로 큰 짐을 끌고 이동하였다가 다시 호텔로 가는 미니버스에 옮겨 싣고 다음 날 아침에 이 과정을 거꾸로 해야 하는 번거로운 절차 때문에 녹초가 되었다. 그러나 모두들 ‘이제 시작일 뿐이야.’하는 애써 여유로운 표정으로 넘겼다. 또 하나는 비행기 지연 출발이다. ‘여행은 기다림이다.’라는 격언을 익히 알고 있지만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막연한 기다림은 ‘시간고문’이었다. 같은 항공사를 이용하는 통과여객의 수하물은 자동으로 연계되는 시스템과 대기시간이라도 예고제 같은 것이 아쉬웠다.

▲ 포카라 공항에 안착한 일행이 기념사진을 남겼다.


19일 늦게 포카라 숙소에 짐을 풀고 인근 한인 식당에서 저녁 식사를 하였다. 된장과 고추장, 헌 옷과 책, 학용품들도 전해 주었다. 후원하는 초등학교에 보내진다고 하였고 고생한 만큼 유용하게 사용되기를! 다만 우리들의 수고에 비해 주인의 태도는 좀 서운하였다. 바쁘고 힘들어서 그랬겠지만 좀 더 친절한 감사 표시가 있었더라면 하는 느낌이었다. 더구나 우리는 이역만리에 힘들게 찾아 온 식당 손님이 아닌가? 그래도 주인의 이야기에서 두 가지는 뇌리에 남았다.

하나는 “가져갈까 말까 하는 물건은 모두 두고 가라.” 는 말이었다. 이 충고로 상당한 짐을 숙소에 놓고 가게 되었다. 다만 아이젠은 꼭 필요했었다. 또 하나는 “한국인들은 유럽 사람에 대해서는 저자세인데 못사는 나라 사람들에게는 고자세를 취한다. 네팔 포터들도 똑같은 사람이다.”는 말이었다. 우리들은 뜨끔했으며 경각심을 가졌다. 이 말은 등반 내내 포터들과 더욱 인간적인 나눔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 히말라야 숙소. 호텔 리버파크. 그곳에서 여러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포터들과 상견례후 기념사진을 찍었다.

출발
1월 20일. 드디어 트래킹 시작이다. 네팔인 포터 6명과 우리대원 9명 총 15명이 출발했다. 모든 짐은 두 대의 인도산 지프 지붕 위에 실었다. 잦은 중앙선 침범과 비포장의 좁고도 울퉁불퉁 패인 가파른 길로 인해 ‘우워’ 하면서 우리는 원하지 않은 스릴을 즐겨야만 했다. 운전사는 동요도 없이 속리산 말티재 같은 꼬부랑 길을 세 시간 정도 달렸다. 스마트폰에 maps.me라는 앱을 깔고 보니 이게 고속도로(highway)라고 적혀 있었다. 게다가 확장 공사 중이라 자주 서다가다를 반복했다. 지프는 힐레(1470m)라는 마을까지 데려다 주고 떠났다. 포터들의 느린 발걸음을 따라가다 보니 좌우 보이는 것이 많다. 곳곳에 산촌 마을이 있고 이색적인 풍광들이 시야에 들어온다. 사람들의 표정이 해맑다. 이들의 삶에 깊은 영혼이 있음을 헤아려본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양한 삶의 색깔을 만끽할 수 있었다.
 

▲ 포카라 도심의 풍경. 높지 않은 건물들이 빽빽하다. 트래킹의 출발 도시인 포카라는 순천 크기다.
▲ 건물 벽에 걸어둔 꿀벌집
▲ 나무조각품의 정교함과 아름다움

하루 일정
보통 저녁 미팅하고 10시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 7시경 식사 후 8시 30분경 출발하였다.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추워지고 온수 사정이 좋지 않아 머리 감기는커녕 고양이 세수가 일상이었다. 출발 전 둥그렇게 모여 준비운동을 하고 함께 구호를 외쳤다. 서로 옆 사람과 손뼉을 마주 치면서 "웬만하면 참자! 웬만하면 웃자!" 세 번. 처음에는 다소 생소하였으나, 안전사고 예방과 정신무장에 도움이 되었다.

평편한 길도 있지만 가파른 계단이 많았다. 경사따라 다르지만 보통 40여분 걷고 잠깐 쉬었다. 쉬면서 따뜻한 물을 마시거나 사탕이나 에너지바 등을 먹었다. 가이드 격인 포터가 맨 앞서 걸었고 맨 뒤에 배대장이 걸었다. 세 시간 전후 걷고 나면 새로운 롯지에서 점심을 먹는다. 약 한 시간의 식사 겸 휴식 후 오후 행군이 다시 시작된다. 오십이 넘은 이들에게 걷기를 발로만 하는 것은 무리였다. 양손의 스틱을 이용해 네 발로 걸었기에 무릎관절이 버티고 무사히 완주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돌계단을 오르며 불렀던 노래들도 큰 힘이 되었다. 옛날 선조들이 기나긴 하루의 노동에 지쳐갈 때 함께 노동요를 불렀을 것이다. 우리도 끝없는 계단을 오르면서 ‘싸목 싸목! 한걸음 두걸음! 비쓰따리 비스따리!(천천히 천천히)’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불렀다. 때로는 합창을 했고, 때로는 이어 부르기를 했다. 대체로 하루에 짧게는 5시간 길게는 8시간 정도 걸었다.
 

▲ 대보름행사를 떠올리는 악대들


저녁 식사 후에는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신다. 이어 주제발표와 대화마당을 시작하였다. 피곤하지만 하루를 돌아보고 서로의 느낌을 나누고 더 깊이 이해하면서 우리들의 우정도 깊어졌으리라 확신한다. 이후에는 각자 뜨거운 물을 담아 방으로 들어간다. 이렇게 하루 여정이 끝난다. 지상의 만물이여, 하늘의 별들이여, 그대들도 오늘밤 편안하라!

세계 각국에서 온 많은 등반객들을 마주쳤다. 그 때마다 서로가 “나마스테!(원뜻은 ‘내 안의 신이 당신의 신께 문안 인사를 드립니다.’라고 한다.).” 했다. 등반객들이 고용한 포터(하루 인건비가 16000원 정도이니 팁을 합해도 2만원 이내)들도 많이 만났다. 힘들게 무거운 짐을 지고 오는 포터들에게 그런 인사 자체가 더욱 힘들게 하지 않을까 조심스러워졌다. 우리나라 한 여행사 행렬이 특히 눈에 띄었다. 고용한 포터 숫자도 많았고 짐의 크기도 훨씬 컸다. 우리음식을 먹기 위해 전문요리사를 동반하고 솥과 가스통, 부식을 지고 다녔다. 고객의 요구라지만 무언가 좀 씁쓸했다. 비록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만, 저런 노역을 시켜서 입에 맞는 음식을 먹어야 한단 말인가! 자기 짐을 스스로 지고 다니는 젊은 서양인들을 보면 더욱 착잡한 마음이었다.
 

▲ 히말라야 세르파. 고산지대 짐꾼, 포토로 불리는 이들은 티벳에서 이주해온 고산족이다. 15~20 킬로그램의 짐을 메고 트래킹의 종착점까지 걷는다. 팁을 합해 2만 원 정도를 받는다. “아무리 고산족이라 하지만 그들도 인간인지라 안타깝고 미안하다.”는 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식사와 롯지(lodge)
높은 산의 등반은 고행이면서 또한 식행(食行)이다. 힘든 노동 다음의 식사야말로 등반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이고 즐거움이다. 롯지는 숙소이면서 세 끼 식사와 차를 마시는 곳이자 대피소이기도 하다. 게스트 하우스나 호텔 등의 이름이 있지만 기능은 같다. 롯지는 가이드 겸 대장 포터가 결정하고 우리는 메뉴를 선택한다. 개인적 친분과 종교적 인종적 친밀함으로 정한다고 하는데 고객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 그들 표현대로 ‘Best View(최고의 전망)’를 고려하는 것 같았다.

▲ 새롭게 건축 공사중인 롯지. 벽은 돌을 지붕은 함석을 사용했다. 롯지는 숙소이면서 세 끼 식사와 차를 마시는 곳이자 대피소이기도 하다.

요리시간은 약 한 시간 정도이다. 식사는 큰 접시에 개인별로 제공되었지만 우리는 우리식으로 여러 메뉴를 시켜서 나누어 먹었다. 차 한 잔에 여러 사람이 입술을 대는 장면을 서양인들이 보았다면 아마도 무슨 ‘쎄리모니’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네팔의 기본 음식은 '달밧'이다. 콩으로 만든 묽은 스프(달)를 찰기가 없는 쌀로 지은 밥(밧)과 야채반찬(떨까리)과 함께 먹는다. 이 '달밧 떨까리'를 기본으로 하여, 피클과 같은 어짤, 새콤매콤한 소스인 쩌뜨니, 고기요리, 요거트를 밥과 함께 섞어 먹는다. 잘 비벼야 제 맛이 난다고 한다. 밥을 먹을 때 손을 사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몇 분은 잘 적응하였고 몇 분은 김치나 고추장이 필요했다. 그 외에도 다양한 감자요리가 있었다. 묽은 버섯스프는 추위에 떤 우리들을 행복하게 해 주었다. 한 번은 닭백숙을 시켰는데 칠면조처럼 커서 도저히 다 먹지 못하고, 다음날 아침 살을 발라 죽으로 먹었는데 맛이나 가격에서 만족도가 높았다. 100% 히말라야산 무공해 토종닭이었다. 단 한 분, 닭고기 알러지가 있는 분께는 대단히 죄송했다. 차 종류는 커피는 물론 몸에 열을 올리는 생강차, 레몬차, 마살라차 등등이 있었다. 일인당 한 끼 식사 비용은 뜨거운 물, 차를 포함해서 약 육천 원 정도였다.

▲ 마술쇼를 하는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뱀

추위와 고산병
1월 이곳 낮 시간은 우리나라 가을 날씨와 비슷해서 가벼운 옷으로도 충분하다. 네팔은 제주도보다 더 낮은 북위 28도이다. 우기와 건기가 있는 아열대 몬순 기후인지라 한겨울이라도 아래쪽은 타잔이 나타날 것 같은 밀림이 우거지고 햇빛이 비치는 쪽으로는 여러 색깔의 랄리구라스(네팔 국화)이 만개하였다. 해발 2000M가 넘는 곳에서도 바나나 나무가 자라고 있었다. 흰 눈이 가득한 히말라야를 상상했던 우리는 더위로 인해 겨울 내복 위로 배낭을 메기도 하였다. 눈이 몇 번 내렸으나 북풍한설은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고국의 강추위 소식에 실소하였다.

영하의 냉방에서 떨면서 잠 못 이루는 밤은 하루 정도였다. 롯지는 두 개의 침대와 이불 베개가 있고 난방이나 방음 시설은 없다. 문아래 틈으로 찬바람이 통했지만 준비한 핫팩과 물병으로 충분했다. 핫팩은 12시간 이상 뜨거움이 유지되었고, 하룻밤에 두 개로도 충분했다. 게다가 뜨거운 물을 담은 물병을 침낭 속에 넣거나 가슴에 품고 자면 그만이다. 종종 숙면을 취할 수 없었던 것은 잦은 잠자리의 변화 때문이었다.

고산병은 개인차가 크지만 3000M 이상을 오르자 한두 명씩 약한 고산병 증세를 보였다. 머리가 좀 아프고 호흡이 가빠진 정도였는데 시간이 지나거나 두통약을 먹으면 낫곤 하였다. 일은 결국 ABC(4130M)에서 터졌다. 굳건하던 달림이가 열이 나며 심한 투통으로 밤새 끙끙 앓았다. 예방으로 두 알의 타이레놀을 먹고 잠이 들었는데 10시와 새벽 두 시 다시 한 알씩 더 먹었지만 차도가 없었다. 포터를 깨워 내려가고 싶었지만 어디서 자고 있는지도 몰라 무조건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온갖 술을 섞어 퍼마시고 난 다음날처럼. 혹시 등산 초반 ‘왁시’라는 술을 마셔서 안나푸르나 산신(山神)의 노여움을 사고 있나 싶었단다. 일출 구경은 고사하고 동트자 바로 하산하였다. 아래 롯지(MBC, 3700M)로 내려와서야 회복할 수 있었다. 그는 “만용은 금물이다!”는 신의 충고를 들었다고 고백했다. (다음호에 계속)
 

글 안나푸르나 여행단/ 정리 박발진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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