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여전히 농촌지역이 도시지역 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 김계수 조합원

택호란 농촌에서 결혼한 어른들을 마을에서 공식적으로 부르는 호칭이다.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근대화되기 이전에 도시에서도 택호가 쓰였던 것 같다. 택호는 대개 시집온 여자의 친정 동네 이름을 따서 아내는 ‘ㅇㅇ댁’이라 불렀고, 남편은 자연히 그 처가 동네 이름을 따라 ‘ㅇㅇ양반’이 되었다.

우리 어머니는 도신떡이라 불렸는데, 어렸을 적에 나는 사람 이름에 웬 떡인지 몹시 궁금했었다. 그러나 가까운 거리에 있는 외가댁을 드나들면서 외가 동네 이름이 도신 마을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 어머니가 그렇게 불리게 된 까닭을 아주 어렸을 적에 이해하게 되었다. 어른들은 택호를 ‘태고’로 발음했는데, 발음 습관으로 보자면 택호는 떡호라 해야 할 듯하다.

두 세대 전만 해도 혼인이 지리적으로 매우 가까운 범위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같은 마을 안에서도 친정 동네가 같은 떡들이 있었다. 동네의 한 친구 어머니는 동북떡인데 친정집이 우리 외가댁 바로 아랫집이다. 혼인 후에 고향 동네로 늦게 들어오는 바람에 도신떡이라는 떡호를 우리 어머니에게 선점당하고 대신 남편의 출신지인 화순 동복을 떡호로 받게 되었다. 또 고향 동네 바로 위에 있는 송곡 마을에서 시집온 이가 두 분 있었는데. 나중에 오신 분은 송곡떡 대신 헤멩떡이 되었다. 고향집 바로 아래에 살던 친구 어머니다.

헤멩떡이라는 떡호는 친구의 외가 동네가 어딘지 알고 있던 어린 나에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인근에 그런 이름을 가진 동네가 없었고, 동네 이름으로 썩 어울리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함양댁이다. 송곡떡이 이미 있으니 함양박씨인 그 분 성씨의 본관을 따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동네에는 또 친정 동네가 벌교인 광산떡이 있는데 광산김씨다. 내가 알지 못하는 벌교떡이 전에 있었던 모양이다. 떡호는 대개 부녀자들이 모이는 품앗이방이나 빨래터에서 자연스레 결정된 듯하지만, 이런 경우는 동네의 터줏대감이 정해줬을 것이다. 고향 동네의 송암떡은 주암호가 들어서면서 삶터가 수몰되자 송광면에서 지금의 구암 마을로 왔다 하여 두 지명에서 한 글자씩 따서 마을의 어른이 새로 지어준 떡호다.

함양댁이 헤멩떡으로 변신하는 과정은 전라도 말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로서 발성에 따르는 에너지 소모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중모음이나 복모음을 기피하고, 입을 최대한 적게 벌리기 위해 ‘ㅏ’나 ‘ㅗ,ㅐ’ 대신 ‘ㅓ,ㅜ,ㅔ’를 쓰려는 습관이 그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동네에는 세펜떡 할머니가 있는데, 그분은 인근 송광면 신평리가 고향 마을이라 한다.

이미 죽고 없거나 나이 많은 분들의 떡호는 일본 식민 지배 권력이 행정구역을 한자어로 고치기 이전에 불렸던 순수 우리말로 된 옛 마을이름을 딴 것이 많다. 이런 떡호는 ‘실, 말, 몰, 골, 굴, 터’ 등 마을을 뜻하는 말로 끝나는 경우가 많고 그 동네의 특성이나 유래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고읍들의 한 가운데 있는 들몰, 동네 앞에서 사금이 났다는 금실, 밤이 많이 났을 밤실, 가래나무가 많았다는 가라굴, 소나무가 많았던 솔터, 우리 외할머니의 친정 동네인 낙안의 어느 안골은 모두 참 친근하고 정감 있는 이름들이다. 그러나 들몰은 평촌으로, 금실은 칠동으로, 밤실은 쌍율로, 가라굴은 추동으로, 솔터는 송기로 바뀌어버렸다.

고유어와 한자어 이름을 함께 갖고 있는 동네에서 두 분이 시집온 경우에 먼저 온(나이 많은) 사람은 고유어 떡호를, 나중에 온 사람은 한자어 떡호를 받았다. 우리 동네에는 구암떡과 남바구떡(작고)이 있는데 두 분 다 내 고향 마을(구암)이 친정이다. 고향 마을 앞에는 옛날 남이 장군이 낙안읍성을 쌓기 위해 인근에서 바위를 모아 휘몰아 가다 일부를 남겼다는 전설이 있는 바위 무더기가 있는데, 이것이 동네 이름의 유래가 된 것이다. 남바구는 남은바위다. 그것이 한자어 구암(九岩)으로 바뀌면서 마을 이름은 반쪽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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