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학자 김현진의 재미있는 순천사]

순천에서 귤과 유자의 재배 시점은 1413년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는『태종실록』1412년 음력 11월 21일자 기사에 “제주도 감귤나무 수백 그루를 순천 등 호남의 바닷가 고을에 옮겨 심게 하였다.”라고 한데서 확인된다. 이후로 귤과 유자가 순천의 토산물이 되었는데, 이는 1530년에 간행된『신증동국여지승람』권40에서 확인된다. 참고로 이 책에 낙안・광양・고흥[흥양(興陽)]의 토산물로는 유자가 언급된다.

조선시대 귤은 나라에 바치는 물품, 즉 공물(貢物)이었다. 왕실에서는 공물로 받은 귤의 수요가 증가하자 제주도 외의 추가 재배지가 필요하였다. 그래서 조정은 순천을 비롯한 호남 바닷가 지역에 귤나무를 이식하는 시책을 폈고, 그로인해 ‘귤과 유자의 고장 순천’이란 글에서 말한 것처럼 순천에 귤이 성행하게 되었다.

그런데 1801년 순천으로 유배와 5년을 지낸 개성(開城) 사람 한재렴(韓在濂,1775-1818)은 「연자루」 시에서 감귤이 회수(淮水)를 넘어 북으로 가면 탱자로 변한다는 ‘귤화위지(橘化爲枳)’의 고사를 인용해 “귤과 유자 남방의 토질에 알맞음을, 지봉이 시에서 자주 말했지. 지금 만약 귤이 있다면, 당시 진상하던 여지였으리.[橙橘南方是土宜,芝峯詩裏屢言之.如今但有踰淮枳,應爲當時進荔枝.]”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양귀비가 좋아한 진상품 과일 여지에 비견되는 순천의 공물 귤과 유자가 1800년대 초에는 없음을 알 수 있다. 그 많던 귤과 유자는 어디로 갔을까? 주암에 거주한 조현범(趙顯範,1716-1790)이 1784년 순천의 역사 사실에 대해 보고들은 것을 기록해 완성한『강남악부(江南樂府)』의 「귤나무를 베다[斫橘行]」에 그 해답이 있다.

뜰에 귤나무 심지 말게   庭前莫種橘
귤나무 많으면 반드시 귤도 많고  橘多必多實
귤이 많으면 반드시 토색이 심하며  實多必多索
토색이 심하면 귤을 어디서 내리  索多橘何出
귤이 있으면 괴롭고   有橘已爲苦
귤이 없으면 편해지겠지   無橘庶得逸
귤나무 베어도 전혀 아깝지 않고  斫橘非小惜
공물 바치고도 사랑받지 못했네  貿貢非所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君不見
연주의 석종유가 다시 솟아난 것을  連山乳穴復爲生
조정이 정치를 잘하면 백성들이 좋다네 上有祥政下得吉

공물로 귤을 바친 것에 대한 사랑은커녕, 위정자들의 극심한 토색질 때문에 차라리 귤나무를 베어버리는 것이 더 낫다고 보는 당시 민간의 현실이 짐작된다. 이 점이 바로 순천에서 귤나무가 흔적조차 없이 사라져 지금까지도 볼 수 없게 된 원인인 듯하다. 주렁주렁 매달린 귤과 유자가 빚은 풍광 뒤에는 백성들의 한 맺힌 눈물방울이 얼룩져 있었으리라.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