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규 
시인, 생명평화결사 
운영위원장

사람들은 무엇이든 자신이 모르는 것은 일단 거부하거나 인정하지 않거나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달리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이 아는 것만으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 박사나 학자라 하더라도 한 인간이 아는 것이라고는 우주라는 실제 공간의 실제 현실에 비추어보면 허공의 먼지만큼이나 사소한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자신이 알고 있는 그것이 옳건 그르건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산다. 그것이 전부인양 생각하며 산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러하니 어쩌면 그것이 인생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러한 에고의식에 매몰되어 사는 것을 불가에서는 치(痴),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실사구시(實事求是)적으로 살지 못하고 전도몽상(顚倒夢想)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그림자에 가려 사물과 그 이치를 바로 보지 못하고 옳고 그름을 떠나 자기 생각대로만 살아가는 경우가 태반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편이 더 속편할지도 모른다. 무식자가 용감하다고 내가 생각한 것이고 내가 그렇게 믿는 것이니 나는 그냥 이렇게 살겠노라고. 이게 오히려 후회 없는 삶이 아니냐고 하면서. 그러면서 우리는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하나의 우주라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한 생명이 한 우주라고 말하는 그것은 사람 하나하나는 모두 완벽한 존재라는 의미와 닿아 있는 말이다. 말하자면 현실은 전도몽상의 어리석음 속에 있지만 본래성품은 그렇지 않고 완벽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단군 때부터 삶의 목표로 성통공완(性通功完)을 이야기 해왔다. 본성을 꿰뚫어 알아 세상에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앞서 말한 에고의식으로 삶을 인식하는 어리석음을 벗어나서 자신의 본성(참나)을 깨달아야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생명은 그 자체로 본래성품이 완벽하니 그것을 되찾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는 것이다. 그래서 붓다는 모두에게 불성이 있고 모두가 부처라고 한 것이 아닌가.  

하지만 성통공완(性通功完)의 경지는 결코 쉬운 경지는 아니다. 우리가 어쩌다 제 정신이 돌아와 잠깐 그런 상황을 수용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성자들이나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늘 겸손해야 한다.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삶의 모든 것이라고 앞세우는 순간 그것은 이미 어리석음의 대열에 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겸손은 단순히 자신을 낮추는 행위가 아니라 이런 어리석은 자신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생기는 것이라 하니 겸손이야말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아무리 내가 잘났다 해도 그것은 상대적인 것이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다 해도 사실이 그렇지 않은가. 그래서 겸손은 이미 완벽한 존재인 자신을 바라볼 때 자연히 생기는 것이기도 하다. 나의 상대적인 어떤 우월함을 완벽한 존재인 나의 입장에서 바라보며, 그것이 얼마나 부족한 것인가를 알아차릴 때 겸손함의 자리가 뚜렷해진다.

이런 진정 겸손한 경지를 알아차린 자라야 소위 우주적 관점에서의 완벽한 당신이나 완벽한 상황이라는 그 무엇을 겨우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내가 본래 완벽한 존재이고 그 존재가 사는 현실이 완벽한 상황이라는 것을 그대로 수용할 수 있으려면 겸손함을 바르게 알고 또 언제나 놓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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