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변화에 따라 표변하며 개인 희생 요구

한국 현대사에서 아시아-태평양전쟁기 경험은 비록 짧은 기간에 그쳤지만 많은 폐해를 남기고 해방 후 국가건설 과정 속에 연속적으로 이어졌다. 그 중 하나가 ‘산업전사’ 이념이다. “우리가 갈 길은 하나. 나서라 산업전사! 미영(美·英) 격멸에” 이것은 침략전쟁에 필요한 노동력 동원을 위해 일제가 유포한 강렬한 선전 문구이다.

‘산업전사’는 아시아-태평양전쟁기 총동원체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생성된 호칭이었다. 산업전사 이념은 후방의 노동자가 무기를 들고 전장에서 싸우는 병사와 같은 마음자세로 노동에 임해야한다는 전쟁 이데올로기를 구현한다. 일본 제국은 노동자를 ‘전사(戰士)’로 명명하면서 국가적 사업에 죽음을 각오하고 생산증강에 나서야한다는 이념을 설파했다.

노동자를 ‘전사’로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의 확대와 직결되었다. 일본 제국은 중일전쟁을 시발로 하여 본국과 식민지를 아우르는 총력전체제에 돌입하였고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과 1939년 국민징용령을 공포하여 물적 인적 동원을 법제화하였다. 노동의 전사화는 ‘국민징용령’ 발동을 계기로 대상과 이념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 국민징용령은 전시 노동력 동원 방법 중 가장 강력한 강제력을 갖는 것이었다. 병역과 마찬가지로 국가권력의 명령으로 ‘국민’에게 노동 의무를 부과하는 법령이다. 징용의 대상이 되는 노동자는 공식적으로 ‘산업전사’로 명명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산업전사로 호칭되면서 노동관념에 대한 근본적인 전환이 요구되었다. 임금은 노동의 대가로 받는 것이 아니라 국가에 봉사하는 대가로 지급되는 것이며, 노사의 대립이나 갈등 자체가 부정된다.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구 열강과의 전투인 ‘성전’ 완수를 위해 일체가 되어야 한다는 ‘노자일치’로 전환된다.

노동자를 전사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산업전사는 후방에 있으나 전선을 앞에 둔 것과 같은 정신자세를 갖추도록 요구되어졌다. 전투군단으로 전환된 노동현장의 일상은 언제든 전투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는 군대와 같은 군대식 규율이 구현된다. 그리고 그 구현방법은 죽음을 불사하는 멸사봉공 정신이었다.

노동자를 ‘산업전사’로 지칭하는 관행은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물론 최근에는 거의 등장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실체적 용어라기 보다는 과거 회상용으로만 간혹 쓰여지고 있다. 일본 패전후 전쟁의 영향력에서 벗어났지만, 전쟁과 함께 탄생한 산업전사라는 용어는 국가권력의 변화에 따라 그 이념과 내용을 달리하며 끈질기게 지속되었다.

미군정기와 이승만 정권하에서 산업전사상은 ‘애국’과 ‘산업재건’이라는 내용물로 채워졌다. 이때의 산업전사 담론은 국가산업에 중요한 존재임을 부각시키면서 정치적 행위를 전적으로 부정하는 동시에 노동자의 권리는 부정되고, 국가를 위한 의무만를 강조하는 새로운 형태의 국가주의 이념과 짝을 이룬다. 해방공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적대세력은 공산주의자로 치환되었다.

196,70년대 산업전사는 조국 근대화의 역군, 공업입국의 기수, 경제건설의 ‘전사’로 명명되었다. 조국근대화를 위한 수출 증대는 성전(聖戰)으로 간주되었다.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는 군인처럼, 노동자도 수출이라는 국가적 목표를 완수하기 위해 모든 노동력을 투여해야 했다.

산업전사라는 호칭은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다. 하나는 전쟁이다. 실제 전투가 이루어지는 전쟁이든 혹은 전쟁을 무의식 속에 인지하고 있도록 하는 전시감이든 전투와 전쟁을 내포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국가주의이다. 산업전사는 태생 자체가 국가주의를 내포하고 있었다. 국가를 위해 개인의 인내, 희생, 봉사를 담지하도록 요구된 호칭이다. 전투를 연상하는 산업전사가 해방 이후 국가권력의 지향점이 변함에도 매 국면마다 다시 소생한 것은 아시아-태평양 전쟁기 식민권력의 문화적 효과가 장기간 지속되었음을 보여준다. 그 효과는 일상 속에서 전시 긴장감, 인내, 또 어떤 측면에서는 폭력성을 내포하는 전시감을 갖게 한다는 점이다.

이병례(순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 연구교수)

※ 이 글은 순천대학교 인문학연구소가 주최한 학술대회 <국가권력과 이데올로기 (2018.2.10.)에서 발표한 원고를 요약한 것임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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