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호
순천여고 한국사교사

우리 지역은 가치 있는 문화재와 유적이 참으로 많다. 하지만 우리가 그 중요성에 비해서 그 가치를 소홀히 하는 곳이 있다. 그곳은 순천왜성 또는 왜교성이라 부르기도 하고, 해룡면 신성리에 있어서 신성포 왜성이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이곳은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입장에서 새삼 그 가치에 주목하게 되었다. 왜교성 전투가 1598년에 벌어졌기 때문에 올해는 420년이 지난 7주갑이다. 사람으로 치면 7번째 회갑을 맞았다는 말이다.

일본군의 순천 왜성 축성목적은 지구전을 계획한 가운데 기회를 보아 호남지방을 온전히 장악하기 위한 발판으로 삼으려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광양만의 요충지를 군거지로 택한 것은 남해와 사천으로 이어져 영남 해안지역에 포진된 자국군과의 협동작전을 고려하였기 때문일 것이며, 물론 전세가 그들에게 불리해질 경우에는 철병하는 데도 유리한 지점이라고 판단하였을 것이다.

여기서 벌어진 전투를 왜교성 전투라고 하는데 9월 20일부터 11월 19일의 노량해전에 이르기 까지 2개월을 계속한 장기전이었다. 흔히 “내 죽음을 알리지 마라”고 하면서 순국하신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 해전은 왜교성 전투의 마지막 전투 쯤 된다고 생각하면 된다.

이 왜교성 전투는 조선과 명, 일본 3개국의 수륙연합군이 얽혀 싸운 최대의 격전이었을 뿐 아니라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였다. 조명 연합수군에 의해 고니시군의 귀로가 차단되고 있음을 확인한 그들은 왜교성에 구원하러 갈 것을 작정하였다.

11월 18일 남해 창선도에 집결해 있던 일본군이 마침내 왜교성의 고니시 유키나가군을 구원하기 위해 수백 척의 전선을 동원하여 노량해협을 향해 출진하였다. 이들은 당초에 사천성을 지키고 있던 시마즈 요시히로군과 남해성의 소 요시토시군 등이었다.

이 때 조선과 명 연합수군은 일본군의 정보를 사전에 입수하고 전군을 좌우 양협으로 편성한 뒤 진린의 명 수군을 좌협으로 하여 사천 죽도 부근에서,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우협으로 하여 남해 관음포 해역에서 각각 적을 기다리게 하였다.

19일 새벽 일본군의 선단이 드디어 어둠 속을 뚫고 근접하여 오자 진린은 도독기를 높이 올린 다음 북을 크게 울리면서 진격명령을 내렸고, 이순신도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며 먼저 적의 선열 중간부분을 돌격해 들어갔다.

이런 와중에 군관 송희립은 통제사 이순신과 같은 기함에 올라 독전하던 중 이마에 적탄을 맞고 기절하였다. 송희립이 적탄에 맞은 사실을 확인한 통제사가 그를 찾아 구하려는 순간 그 자신이 왼쪽 가슴에 적탄을 맞아 치명적인 손상을 입고 말았다.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 좌우에서 모두 군막 안으로 부축하여 들였는데 임종에 앞서 이 충무공은 주위에 당부하기를 전투가 끝날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발설하지 말라 하였다. 잠시 후에 휘하 장수들이 그에게 소리쳐 승전을 알리자 간신히 눈을 떴다가 다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순천왜성의 가치는 단순한 전적지로서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순신이 11월 17일에 쓴 난중일기의 마지막 줄은 이렇게 끝난다. “잡은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이었다.” 당시에도 작전통제권을 명에 넘겨준 상황에서 가슴 아픈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전시작전통제권 환수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유적지이자 한·중·일 삼국의 치열한 전쟁터로서 동북아 평화를 생각하고 동북아 평화가 곧 세계 평화와 직결된다는 것을 학습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곳이기 때문에 순천왜성의 가치를 새삼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천이 생태수도를 넘어 동북아 평화교육의 본거지가 되는 날을 꿈꾸어 본다.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