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여전히 농촌지역이 도시지역 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 김계수 조합원



바깥 날씨는 한겨울 추위가 무색한데 벌써 입춘이 지났다. 농약과 종자를 함께 파는 가게에서 고추씨를 구입하고 파종할 준비를 한다. 몇 해 전까지만 해도 1,200개 들이 고추씨 한 봉지에 2~3만 원 하던 것이 올해는 10만 원짜리까지 나왔다. 부지런한 농부들은 이미 고추씨를 모종상에 넣은 지 오래다. 날씨가 포근한 날에는 할머니들이 밭에 나와 풀이 얼마나 돋았는지 둘러보기도 한다. 한 달간의 내 농한기는 올겨울 유례없는 한파 때문에 닭의 물시중을 드느라 속절없이 지나가 버렸다.

봄이 시작된다는 입춘은 대개 2월 4일이다. 24절기 중에서 내가 날짜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하지와 동지, 그 중간에 밤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춘분과 추분, 그리고 입춘이다. 춘분은 3월 22일, 하지는 6월 22일, 추분은 9월 22일, 동지는 12월 22일이고 모두 해에 따라 하루 전후로 날짜가 바뀌기도 한다.

중국 문명의 기반이었던 화북지방에서 생겨나 한반도에도 전래된 24절기는 태양의 움직임에 의해 달라지는 기후의 변화를 농경사회의 관점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예를 들어 곡우는 촉촉한 비가 내려 땅 속 씨앗이 움트기 좋은 때이고, 처서는 더위가 한풀 꺾이기 때문에 가을 채소의 씨앗을 넣을 만한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1년 365일을 스물넷으로 나눴으니 대개 보름 만에 절기가 하나씩 들어있는 셈이다.

24절기의 마지막은 대한이고 입춘은 그 시작이다. 입춘 무렵에 맞춰서 설날을 배치한 것은 그것이 봄의 시작임과 더불어 한 해의 시작이라는 뜻이다. 다분히 농경사회의 의식을 반영한다.
서양에서 태양이 다시 깨어나기 시작하는 동지에 맞춰 설날을 배치한 것과 대조된다. 굳이 의미를 부여하자면 서양에서는 객관적인 세계(천체)의 변화를 기준으로 시간을 쪼갰다면  동아시아에서는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 근거해서 시간을 구분했다고 할 수도 있겠다. 많은 사람들이 24절기는 동양 문화의 산물이고 오래 전부터 우리 민속 속에 전래된 것이라 음력에 바탕을 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입춘을 날짜로 기억하는 것은 그 날이 우리 큰 아이의 생일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날은 새로운 한 해 농사철이 시작됐음을 알리는 날이고 따라서 농사꾼으로서 마음가짐을 다잡아야 하는 날이기 때문이다(당연한 일이지만 도시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 입춘 같은 것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살았다). 한 해 농사의 출발점이 되는 이 시기에는 당연히 작부 계획이 세워져 있어야 한다. 작부 계획이란 ‘어떤 작물을’, ‘어느 논밭에’, ‘얼마나’ 심을 것인지에 관한 계획이다. 이런 계획은 전업 농부뿐만 아니라 텃밭 농사에도 필요할 것이다.

어떤 작물을 재배할 것인지는 경작하는 논밭의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면 습기가 많은 땅에는 토란 농사 말고는 달리 심을 것이 마땅치 않다. 대부분의 밭작물은 배수가 불량한 땅에서는 잘 자라지 않기 때문이다. 또 경작지가 북으로 언덕이 있어 볕을 모아두는 곳인지의 여부나 일조 시간도 판단하여 그에 맞는 작물을 선택해야 한다.

벼농사를 대규모로 짓는다면 이런 계획은 그다지 필요치 않다. 대부분의 작물은 한 곳에 반복해서 심으면 장해가 나타나는데 벼농사는 그렇지 않다. 벼논에 들어온 물이 빠지면서 독성을 빼내기 때문이라 한다. 동아시아 지역의 수도작 문화가 수천 년 동안 지속될 수 있었던 이유다. 이러한 연작 장해를 피하기 위해서는 돌려짓기(윤작)와 사이갈이(혼작)를 해야 한다. 더불어 일 부담이 한 시기에 집중되지 않도록 가능하면 수확이나 파종시기가 겹치는 것을 피해야 한다. 또 이모작할 수 있는 작물(대개 야채류)의 배치도 고려 사항이어서 작부 계획을 짜는 것은 꽤 만만치 않은 일이다. 그러나 상업적 농업이 보편화된 터에 수익성이 판단의 첫 번째 기준이 되고 여기에 욕심이 들어가 한 해 농사가 끝나고 나면 그릇된 계획이었다고 느껴지는 때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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