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도 베니스처럼 멋진 시립미술관 있었으면”

순천만의 감성을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로 명성을 얻고 있는 김일권 화백(55)을 만났다. 그의 인지도는 전국을 넘어 세계적인 수준이다. 그림은 뉴욕 크리스티에서도 거래됐다. 영상예술공학 박사인 그는 회화뿐 아니라 영상예술에도 조예가 깊다. 전남대 예술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하다. 그를 순천 중앙시장에 있는 자신의 화실에서 만났다.<편집자 주>
▲ 김일권 화백


세계를 편력하고 돌아오다
그는 백남준의 스텝이었다. 스물여덟 살. 대학을 졸업한 나이. 뉴욕 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예술가들이 꿈꾸는 소호거리에서 고향선배 소개로 고 백남준 선생을 만났다.

“교과서에서나 보던 선생님을 만난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

“3년 정도 백 선생의 휘하에서 여러 예술가들과 함께 ‘시다바리’, ‘가방모찌’로 지냈다.”며 겸손하게 너스레를 떤다.

‘맹장 밑에 약졸 없다.’더니 김 화백은 회화와 미디어 예술에 자신의 인생을 쏟아 붓고 있다.
순천은 그의 고향이다. 이곳에서 나고 철이 들 때 까지 자랐다. 교편을 잡으셨던 아버지가 외지에서 순천에 들어와 자리를 잡으셨던 때문이었다.

화가의 운명과 만난 것은 철이 들기 전이었다.
“열 살 때 소년한국일보가 주최한 미술대회에 나가 최우수상을 받은 것이 계기였다. 어머니께서 ‘이게 네 길인가 보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런 반대에도 그가 예술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격려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순천에 산다. 10여 년 전 국립 여수대 교수로 있을 때 돌아왔다. 80세가 된 노모와 매산고등학교 인근에서 지낸다. “연로하신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다. 처와 아이들이 있는 광주에는 일주일에 이틀, 학교 강의를 위해 다녀온다. 전국에 지인들이 많은 터라 나들이는 많은 편이란다.
아버지와도 화해했다. “교수가 됐을 때 선친의 태도가 바뀌셨다.”
 

▲ 화포해변에 선 김일권 화백. 그는 영감과 정신적 치유를 위해 순천만을 찾는다

미니멀 순천만으로 평화를 전하는 화가
그가 순천에 사는 것은 어머니 때문만은 아니다. 순천이 그의 생물학적 고향일 뿐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기 때문이다.

그는 ‘순천만 작가’로 불릴 만큼 순천만을 소재로 한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늘과 땅이 선명하게 구분되는 풍광을 화폭에 옮긴다. 자연의 형태를 그린 것이지만 이미지는 많이 단순화돼 마치 추상화인 것처럼 보인다. 미니멀하지만 형태적 요소를 모두 버리지는 않았다.

김 화백은 이런 단순화를 통해 평화의 감성을 전달하고자 한다. 그는 “그림에서 평화의 감성이 흘러넘치기를 바란다.”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내적 수련과 창의적 영감의 문제”라고 말한다. 그것이 그의 화두인 셈이다.
 

 Untitled4, 2016, oil on line, 168×153cm 김일권


‘평화의 감성이 흘러넘치는’ 작품을 얻기 위해 그는 계속해서 순천만을 화폭에 옮긴다. 물론 김 화백의 의식의 과정을 거쳐 생성된 새로운 순천만이다. 그의 화실에는 이렇게 그려진 수많은 순천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를 찾아 갔을 때도 이젤 위에는 작업 중인 순천만의 그림이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캔버스 너머에는 전파상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전기·전자부품들이 여기저기 쌓여 있다. 미디어 예술 작품을 제작하는 데 사용하는 재료들이다. 그에게 그것들은 회화를 위한 물감과도 같다.
 

미디어로 표현하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전자공학 공부도 했다. 그래서 2000년대 초 서강대에서 영상예술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작은 물론 고 백 남준 선생과의 만남이었다. 프로젝트가 있으면 백 선생이 그를 비롯한 여러 예술가들에게 부분적인 일들을 나눠 맡겼다. 얼핏 보면 허드렛일 같았지만, 그 과정이 모두 공부가 됐다.

“함께 작업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공부가 됐다. 우리를 잘 챙겨주셨고, 가끔씩 툭툭 던지듯 해주는 말씀이 모두 어록과 같았다.”
 

 

“예술 배경은 철학, 모든 존재는 의미를 가진다”
회화는 물론 영상예술까지 섭렵하는 그가 또 한 가지 관심을 가지는 분야가 있다. ‘창의적 문화’의 지역 확산이다.

‘존재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고 생각하는 그는 순천 지역에서 자신이 존재하는 의미를 이 지점에서 찾고 있다.

“문화수준이 향상되고, 인재를 길러내고, 그 인재가 다시 문화를 향상시키는 선순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말하자면 건강한 문화생태계다. 순천에 이런 생태계가 조성되기를 바란다.”

“예술은 인문적인 것에 뿌리를 두고 있다. 철학의 산물이다. 의식 속에 개념화된 무언가를 구체화 해 표현하는 것이다. 가능성을 현재화 하는 것. 다다이즘이 그 한 예이다.”

1910년대, 전쟁으로 문명이 폐허화된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노력이 다다이즘이었다. 다다이즘의 결정적 장면으로 꼽히는 것이 뒤상의 변기이다. 이성주의에 입각해 운행되는 듯 했던 세계가 인류의 자기파멸적 전쟁에 이르렀던 모순된 현상에 대한 조롱이며 반항이다. 그것은 기존의 관습적인 예술, 또는 의식에 내리는 죽비와도 같은 것이었다.

김 화백은 이것이 예술가 정신이라고 믿는다. 그는 예술가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좀 더 향상된 상태로 나아가고자 노력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자신도 자신이 속한 예술계 안에서 이런 역할을 하려고 한다.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도 그에게는 이런 생각을 실천하는 한 형태다.

“교수라는 것이 한편으로는 예술을 하기 위한 호구지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기도 하다. 나는 화가가 본업이고 그것에 제일의 가치를 두지만,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예술을 보다 고차원적으로 향유하기를 바란다. 교육은 그런 생각을 실현하는 한 방법이다.”

고유한 문화 담론 가진 순천 되도록 돕고 싶어
그는 이런 생각과 활동을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서도 실천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이 달 초 장안창작마당 ‘봉다리 학교’ 에서 「예술이란 무엇인가」라는 주제로 강의를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예술 소비층이 늘어나야 지역사회의 문화적 수준이 향상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다. 그러나 그는 예술소비도 교육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단순히 미술작품을 사거나, 영화관에 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경험이 예술적 상상력을 발휘하는 지점에 까지 이르러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를 소비하면서 자극받아 창의적 사고를 하고, 실제 문화적 활동도 하는 데에 까지 이르렀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렇게 될 때 문화수준이 향상됐다고 말할 수 있을 거다.”

김 화백은 이런 자신의 노력이 고향 순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서울로 대표되는 중앙문화를 좇아가는 ‘팔로워’가 아니라 자기 고유의 문화 담론을 가진 독자적 문화권이 순천에 형성되기를 바란다. “문화적 향상을 위해서는 복제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그것은 고유의 문화를 생산해 내는 ‘창의적인 문화소비’라고 할 수 있다. 창의적 문화 소비가 예술가의 영감을 자극하고, 그로인해 또다시 예술 창작과 창의적 소비가 반복되는 선순환이 이뤄져야 한다. 말하자면 건강한 문화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는 이를 위해 예술강좌나 예술적 체험의 기회가 제공돼야 하고, 그런 컨텐츠를 담을 수 있는 시립미술관도 건립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순천만이나 원도심 쪽에 베니스 비엔날레가 열리는 미술관을 본받아 만들면 좋겠다.”며 상당히 구체적인 구상도 내놓았다.

세계 최고의 미술전시회로 인정받고 있는 베니스 비엔날레는 베니스의 공원을 중심으로 무기제작소, 조선소 등의 건물을 개조하거나 복원해 사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김화백은 전라남도가 광양에 건립 예정인 도립미술관 자문위원회에 위원으로 참가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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