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타 플랙 렛이비미

누나와 함께 삼형제는 자취를 했다. 형은 기타와 노래를. 누나는 즐겨 듣는 쪽이었는데, 이제와 생각해보니 나의 음악적 자양분은 어깨너머로 듣던 팝송과 샹송 그리고 칸초네, 심지어 락과 메탈음악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누나는 독특한 방법으로 우리의 아침을 깨웠다. 녹음기의 ‘딸깍’하고 시작된 음악은 흡사 작은 시냇물이 마침내 대양(大洋)에 도달하듯 처음엔 무심히 흐르다 어느새 내 영혼을 뜨겁게 휘감고 있었다.

가수면(假睡眠) 상태에서 들리는 음악은 몽환적(夢幻的)이고 아름다웠으며, 감동의 물결이 되었다. 그 기운에 도취되어 법열(法悅)의 시(詩)라도 읊고 싶어 감히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때 내 어린 가슴에 음악이라는 작은 씨앗이 작은 파문을 그리며 떨어졌음은 분명하다. 고등학생이던 누나는 저녁이 되어 밀린 빨랫감을 들고 마당가 공동샘터로 향했다.

비비고 헹구고 비비고 헹구고를 반복하며 허리를 느리게 펴던 모습이 생각난다. 비 오는 아침이면 공동화장실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차례를 기다리던 우산 꽃들이 Debby Boone의 노래와 함께 아련하다.

내 곁에 있어줘요

나의 형 이름은 특이하게도 여자이름 ‘영숙’이다. 형이 초등학교 졸업하고 중학교 진학을 앞둔 시절, 여자중학교로 배정받아서 우리에게 엄청난 부러움을 안겼던 일도 생각난다^^ 공부는 모르겠고, 외모는 그때 장영자 사위로 유명한 연예인 김주승을 탁했다고 어쩌다가 한두 사람이 말을 하곤 했다. 간혹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는데, 이별노래를 부를 땐 자못 심각한 표정과 한풀이를 하듯 핏대를 세울 때면 우세스러울 때가 있었다.

그때 삼형제가 화음을 넣어가며 부르던 ‘Let it be Me’는 잊을 수 없는 노래다. 유도를 했던 형은 잠자리에 들 무렵 깔린 요를 매트리스 삼아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중부양과 중력을 아낌없이 시험했다. 나는 투하된 물체에 지나지 않았으며, 굳히기로 숨은 꼴딱꼴딱, 질식사에 대한 걱정을 좀 했던 것 같다.
 

 

음악은 사랑, 사랑받은 자 사랑을 줄지니

세월이 흘러 아이들을 깨워야 할 시간이면 음반꽂이에 기대어 오늘은 무슨 음악이 어울릴까 행복한 고민을 했던 적이 있다.

비가 내리면 뚝뚝 떨어지는 쇼팽의 ‘녹턴’이 어울릴까, 철학적인 바흐가 좋을까, 화창한 아침은 슈베르트의 ‘송어’가 올려졌다. 한여름의 열정적인 날엔 스키드 로우의 ‘18 And Life’나 콰이어트 라이엇의 ‘Cum On Feel The Noise’를 듣기도 했다. 계절이 바뀌어 가을엔 샹송을 많이 선곡했다. 조르쥬 무스타키의 ‘나의 고독’이나 파리 생제르맹 어린이 합창단의 ‘나의 자유’를 들려줬다. 때론 직접 바흐의 무반주 모음곡 프렐류드를 연주하고 있으면 문이 빠끔히 열리고 눈 비비며 하품하면서 부정확한 발음으로 “아빠, 난 이 곡이 좋아”라며  아이가 배시시 안겨들었다.

나도 인생을 모른다. 왜소하고 보잘 것 없던 내가 음악을 선물로 받아서 좋은 사람들과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고 있는 지금,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란 말이 생각난다. 야구하는 형을 따라나섰던 소년이 어느 날, 형이 아닌 자신이 야구선수가 되어있는 경우처럼, 나를 키운 건 어쩌면 열등감과 부러움의 경계였는지 모르겠다. 음악이라는 작은 배를 타고 인생이라는 항해를 하는 지금,  작은 씨앗 하나가 발아해서 이젠 얼마나 무성하고 튼실한 아름드리 그늘을 만들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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