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수난과‘인생송별회’(17)

▲ 송기득
전 목원대 교수
아내의 정신이 조금 맑아지자, 나는 이제야 ‘인생송별회’를 본격화할 필요를 느꼈다. 아내가 죽을 준비를 할 기회를 주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려면 아무래도 거처를 집으로 옮겨야 할 것 같았다. 아내는 아직도 집이 어디인지 모르지만, 그래도 환경을 바꿔보면 좀 낫지 않을까 싶었다. 수간호사하고 의논한 끝에 우선 집으로 데려오기로 했다. 마침내 2012년 10월 9일에 퇴원했다. 사실 내가 아내를 집으로 데려온 데는 다른 뜻이 있었다. 아내를 쓸쓸한 병원에서 외롭게 보내기 싫었다. 내 따뜻한 품안에서 평안히 보내고 싶었다.

집에 온 아내는 10여년 살았던 아파트도 못 알아보았고, 안방도 낯설어했다. 오랫동안 자신의 손때가 묻은 장롱도, 경대도, 침대도 생소한 모양이다. 기억력을 잃는다는 것은 존재 자체를 잃는 것과 마찬가지인가보다. 아내가 비교적 사람은 잘 기억하는 편이라, 희망은 버리지 않았다. 병원에 있을 적에도 “어째서 내 머리가 뒤죽박죽이야”, “생각이 잘 돌아가지 않아요”, “기억이 안 나요” 따위의 말을 가끔 했다. 나는 아내가 자신의 머리상태를 희미하게나마 알고 있다는 반증이라 여겨, 머리가 맑아지기를 기대할만 했다.

하루쯤 지내자 집안이, 안방이, 화장실이 조금 익숙해진 듯했다. 나는 아내를 휠체어에 싣고 이 방 저 방을 돌아보게 했더니, 차츰 기억을 더듬어 조금씩 알아차린 것 같았다. 설명을 하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기억의 힘을 되찾을 거라는 희망이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흘 째 되는 날, 아내의 기억은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어눌한 발음도 비교적 맑아졌고, 말소리도 좀 더 뚜렷해졌다. 사고력이나 상상력이나 추리력이 현저히 달라졌다. 옛날 일들을 설명하면 기억해내는 일이 잦아졌다. 거실에 걸려있는 우리 부부의 사진을 쳐다보면서, 10여 년 전에 찍었던 상황과 장소와 시기를 말해주었더니 금방 알아차렸다. 사나흘이 지나자 언제 치매였는가 싶을 정도로 정신이 맑아졌다. 내가 판단해도 분명히 치매였는데, 이렇게 정상에 가깝다니 도리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반짝 좋아졌다가 다시 나빠지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아내의 답답증은 쉽게 가시지 않아서, 어느 날은 휠체어에 싣고 아파트 둘레를 한 바퀴 돌았다. 아파트로 들어오는 길은 잊었지만, “저 쪽은 교회로 가는 길이다”고 말했다. 공간감각도 살아나고 시계를 보고 시간도 헤아렸다. 그러면서 차츰 우리가 처음 만났던 일을 기억하기 시작했고, 50여 년 전 교회여름수양회 때 바닷가를 산책했던 것도 자세히 회상해냈다. 집에 온 지 거의 한 달이 가까워지자, 언제 기억이 흐려졌는지 모를 만큼 정상화되었다. 마음에 쌓였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고, 말의 속뜻을 재빨리 알아차리기도 했다. 눈치가 구단이었다. 바둑으로 치면 세 수 앞을 볼 수 있을 만큼 정상임을 확인했다.

그러자 누워서 집안 살림을 간섭하기 시작했다. 집에 오는 요양사에게 일의 요령을 가르치기도 하고, 딸에게 요리하는 법을 일러주기도 했다. 몸도 조금 나아져서 넓은 병상바닥을 밀고 돌아, 눕는 자세가 수시로 바뀌었다. 동쪽으로 누었던 몸이 아침에는 서쪽을 향하고 있다. 어떤 때는 머리가 남과 북을 오가며 뒤바꿔져 있다. 침대 바닥을 사방으로 굴러다닌 것이다. 몸에 힘이 붙은 것이다. 얼굴에 윤기가 조금 돌았지만, 아직도 피골은 상접이다. 발에 부기가 조금 남아 있어, 물을 많이 마시라는 의사의 권고에도, 물조차 넘기기가 힘들어 넉넉히 마시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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