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6월 5일 새벽 4시 20분경.
지방자치단체 선거 개표 장소에 가 있는 선거운동본부장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축하합니다! 당선됐어요!”
“아! 제가요?”
“24표 차이로 당선됐어요! 우리가 해 냈어요!”

그 순간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치고 옆에 있는 사람들과 부둥켜안으며 팔짝팔짝 뛰었다. 나는 그만 자리에 주저앉아버렸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다. “최미희! 최미희!” 연호 소리를 듣고서야 고맙고 감사하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엄마, 저를 낳아주고 키워 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째 잘못됐냐?”
“아니요. 당선됐어요. 제가 그동안 학생운동, 사회운동한다고 부모님 말씀 듣지 않고 속상하게 했는데 이제 엄마, 아버지가 키워주신 은혜를 조금 갚았어요.”
“아니다. 니가 잘 해서 당선됐지 해준 것 하나도 없다. 고생했다. 거짓 없이 세상을 진실되게 살면 된다. 잘했다. 축하한다.”
친정엄마와 나는 울먹이면서 전화로 대화를 나누었다.
 

다시 신발 끈을 맨다!

1989년 2월 28일 순천에 정착했다.
광주 민중항쟁 진실을 알려야 한다며 시작했던 활동을 대학 졸업 후에도 계속하려고 순천으로 몸을 옮긴 것이다.

1989년 3월에 취업한 사업장은 근로기준법조차 지켜지지 않은 여성사업체였다.
하루 결근하면 일당, 생리수당, 주차수당, 월차수당 4일 치가 몽땅 삭감되었다. 동료들과 노동조합을 만들고 노조위원장을 하면서 사업주가 근로기준법을 지키게 했다.

진보적인 여성단체에서는 직장 여성들을 위한 여성 교실, 아이들이 사용하고 난 장난감과 육아 정보를 교환하는 활동, 임신, 출산, 육아휴가 연장과 보장을 위한 입법 활동을 했었다.
장애아이를 낳은 후에는 장애학생들에게 알맞은 교육프로그램과 교사 지원, 장애인들도 사회 구성원으로 살 수 있는 제도를 만들기 위해 전남도교육청과 전남도를 찾아다녔다.

뜻이 맞는 분을 여기저기 찾아다니고 하소연하는 것이 늘 나의 일이었다. ‘예산이 부족합니다.’ ‘아직은 때가 아닙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상대방의 이해정도에 따라 우리 처지가 좌지우지되는 현실은 지치게 할 때가 많았다. 우리와 뜻을 함께하는 정치인을 만나기는 더 어려웠다.

2010년, 직접 정치를 하러 나섰고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당선되었다. 2014년, 박근혜정권 탄압으로 통합진보당 강제해산의 위기 속에 치러진 선거에서 낙선됐다. 2018년, 지방자치단체 선거를 앞두고 직접 정치에 나서기 전 겪었던 절실함을 안고 다시 신발 끈을 맸다. 어두운 곳을 밝히는 촛불처럼 시민이 만드는 순천시를 위해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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