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 끝난 고3 교실에서-

요즘 금-토요일 밤을 접수한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 순천 ‘해태’가 의기양양하게 여수 ‘윤진’에게  ‘무진기행’을 읽어봤냐고 묻는 장면이 나와 화제가 되었다. 순천KBS에서는 올해  ‘제1회 김승옥문학상’을 제정하여 지난주에 수상자를 선정-발표하였고, 이번주(11월 23일)에 시상식을 한다. 순천만에는 김승옥-정채봉 문학관이 있고 순천고 교정에는 서정인-김승옥 문학비가 서 있다.

순천의 자랑 김승옥의 ‘무진기행’읽은 학생 적어
김승옥(72)은 설명이 필요 없는 작가다.  ‘무진기행’과  ‘서울, 1964년 겨울’은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단편소설의 한 정점이다. 특히  ‘무진기행’은 한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다. 이미 새로운 고전의 반열에 든 듯하다. 한국사람이라면 이 정도의 소설은 읽어야 하지 않을까? 눈밝은 순천사람으로서 이 소설을 읽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학교 3학년 학생들에게 물어봤더니  ‘무진기행’을 읽은 학생이 극소수였다.

나는 10월 중순쯤  ‘무진기행’ 전문을 복사해 놓고 때를 기다렸다. 자율학습 기간인 10월 하순~수능 전에 읽는 것이 좋을 것 같았으나 학생들은 수능 이후에 읽자고 말했다. 수능 이후 고3 교실의 문제점을 조금이나마 상쇄하기 위해 그렇게 하자고 했다. 마침내 수능이 끝났고, 가채점과 문제집 방출 행사도 마쳤다.
나는  ‘무진기행’ 전문과 소설 내용을 O,X 문제로 만든 학습지를 안고 ㄱ반 문을 열고 들어갔다. 문제를 많이 맞힌 학생들에겐 상금을 주려고 천 원짜리 지폐도 몇 장 가지고. 그러나 나를 반기는 건 황량함과 황당함이었다. 교실은 썰렁했고, 학생들의 시선은 냉랭했다. ‘선생님, 왜 오셨어요?’하는 분위기였다. 초대하지 않은 잔치에 음식 얻어먹으러 온 사람 대하는 듯했다. 재적 35명 중 20여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몇 명은 면접을 보러 갔고 몇 명은 담임선생님과 수시 상담을 하고 있다고 했다. 자칫  ‘무진기행’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나는 썩은 미소를 날리며 복사물을 배부했다. 소설을 읽는 학생, 핸드폰을 보는 학생, 자는 학생이 각각 3분의 1이었다. “꼭 읽어야 돼요?” 말꼬리를 올리며 물어보는 학생도 있었다.

수능 이후 고3들 책 볼 생각 없어 난감
ㄴ반에 들어갔더니 영화를 보느라 나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공자가 자신을 ‘상갓집 개’에 비유한 심정이 이해되었다. 영화를 끊고 복사물을 나눠 줄까 하다가 ‘답답한 꼰대’라는 소리를 들을까 봐 조용히 복사물만 나누어 주고 말았다. ㄷ반에 가보니 10여명의 학생이 컴퓨터 앞에 모여 게임을 하고 있었다. 다른 학생들은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고 있다고 했다. 하릴없이 교실에 있는 학생들에게만 복사물을 배부하면서 “영화도 보고 축구도 해야 한다. 만화도 보고 컴퓨터 게임도 해야 한다. 그러나 단편소설 한 편 정도도 읽어야 하지 않을까?” 하소연했다. 그러나 여덟 명은 잤고, 한두 명은 핸드폰을 보며 친구와 잡담을 나누었다. 그래도 1명은  ‘무진기행’을 읽었다. 그 학생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교실을 나왔다. 뒤통수가 부끄러웠다.

수능이 끝난 전국 고3 교실에서 해마다 반복되는 풍경이다. 그래서 언론에서 매년 이 문제를 지적한다. 하지만 단위 학교나 교사 차원에서는 이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방도가 없어 유야무야 넘어가고 만다. 되풀이 되는 광경이지만 나는 이 상황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수능 끝난 고3에게‘무진기행’읽게 할 방법은?
이제 ㄹ반과 ㅁ반, 두 반을 남겨 두고 있다. 나는 두 반 학생들에게  ‘무진기행’을 읽게 할 수 있을까? 의미심장한  ‘무진기행’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윤희중은 하 선생에게 편지를 쓴다. “사랑합니다. 서울에서 준비가 되는 대로 소식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아마 행복할 것입니다”라고. 그리고 그 편지를 찢어버린다. 그는 부끄러움을 느끼며 무진을 떠나 서울로 간다. 그에게 ‘서울’은 어떤 곳인가?

나는 윤희중과 달리 무진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그가 간 서울로 갈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문수현
순천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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