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이 글은 ‘사랑어린학교’ 8,9학년 아이들이 관옥 할아버지와 함께하는 마음공부 시간에 나눈 이야기를 채록하여 부분 정리한 것입니다.


  외면하지 마. 맞서지도 마. 똑바로 봐! 거기에 길이 있어

할아버지가 신학교 1학년 때야. 62년도에 막 신학교 들어갔을 때 나를 가르친 선생님이 계셔. 아직도 살아계셔. 97세야. 그 선생님이 나를 엄청 예뻐하셨는데 하루는 교실에 들어와서 난센스 퀴즈를 내셨어.

네모난 커다란 방이야. 그런데 창도 없고 문도 없어. 거기에 나하고 성난 황소 둘이 있어. 황소가 무슨 일로 성이 나서 나를 뿔로 찌르려고 해. 막 도망 다니다가 결국 코너에 몰렸어. 뒤로도 옆으로도 못가고 꼼짝없이 몰렸어. 그 순간 황소가 나를 향해서 두 뿔을 앞세우고 돌진한단 말이야. 어떡할래? 그게 퀴즈였어. 내가 주인공이야.

코너에 몰렸어. 뒤로 갈 수도 없고 옆으로도 도망갈 수도 없어. 그런데 황소가 두 뿔을 들고 씩씩거리며 나를 향해 돌진해오고 있어. 네가 그 사람이라면 어떡할래? 그게 질문이야. 상황을 잘 생각해봐. 생각나는 사람 얘기해봐. 가만 있어? 가만 있으면 배 터져 죽어. (아래로 몸을 숙이면 되지 않을까요? 순간적으로) 숙이면 뿔을 들고 오겠지. 걔도 눈이 있는데. 순간적으로 몸을 낮춘다고? 그럴 수 있어. 그러나 결과는 황소가 또 오겠지? 그 궁지에서는 벗어날 수 없겠지? 승희 너라면 어떡할래? 솔직히 얘기해봐. (황소뿔을 잡아요) 네가 이렇게 큰 황소뿔을 잡고 어떡할래. 네 힘으로는 황소를 이길 수가 없어. 그니까 그것도 답은 아니야. 이건 실제 상황이 아니라 난센스 퀴즈야. 그걸 잘 생각해봐.

내가 1학년 때는 어떤 여학생이 아주 솔직한 대답을 했어. ‘눈을 감아요.’ 그랬어. 눈 감으면 황소가 돌진해오겠지. 실제 상황이면 아마 그랬을지 몰라. 그래서 웃었어. 사실 우리도 아무리 생각해봤지만 답을 몰랐어. 어떤 한 학생도 뿔을 잡는다는 얘기를 했어. 그니까 선생님이 내가 금방 말한 것처럼 ‘네가 황소를 이긴다구?’ 해서 끝났어.

우리는 답을 궁리하다가 끝내 못 찾았어. 그러자 어떤 용감한 학생이 질문했어. 선생님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하고 반문했지. 그니까 선생님이 웃으면서 하는 말이 ‘뿔과 뿔 사이로 쏙 빠져나간다.’ 그랬어. 말이 안 되지? 그런데 말이 돼. 할아버지는 그 말을 잊을 수가 없어. 열여덟 살 때 들었던 말이야.

무서운 일이 닥쳐오고 있어. 그때 우리들이 흔히 하는 일이 눈을 감거나 고개를 돌려. 그러면 백발백중 져. 맞서 싸워? 안 돼. 내 힘으로 이길 수 있는 게 아니야. 내 힘으로 해결될 수 없는 일, 그런 때 어떡하냐? 살다보면 그런 때가 많이 와. 도망갈 수도 없고 맞서 싸울 수도 없고 그런 위급한 상황이 닥쳐올 때 어떻게 할거냐?

그 때 그 선생님이 나한테 가르쳐준 것은 “절대 눈을 감지 마라. 외면하지 마라. 고개를 돌리지 마라. 맞서 싸우려고 하지도 마라. 나를 위협하는 상대방의 정체를 똑바로 봐라. 그러면 거기에 내가 빠져나갈 빈틈이 있다. 그 틈으로 빠져나가면 된다.”고 말씀하셨어.

할아버지는 평생 살면서 어떤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그걸 늘 생각했어. 그래서 그 문제를 회피하려고 하지 않았어. 그것과 맞서 싸우려고 하지도 않았어. 똑바로 보면 거기에 내가 빠져나갈 구멍이 있어. 이 얘기는 너희들도 할아버지처럼 삶의 경험을 통해서 ‘아, 그렇구나!’ 하고 배우는 수밖에 없어.

어려운 일이 있을 때 고개 돌리지 마라. 외면하지 마. 내 문제 아니지 하고 외면하지 마. 내문제야. 똑바로 봐. 반드시 거기에 길이 있어. 내가 안 다치고 뚫고 나갈 구멍이 있어.

그래서 우리나라 속담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이 있어.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 그런 말이야. 정신 안 차리는 게 뭐냐면 외면하는 거야. 겁이 나서 똑바로 보지 않는 거야. 아니면 등지거나. 그러지 말라고. 그런 얘기야.

정리: 이재심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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