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일의 농/정/칼/럼

▲ 김선일
한국유기질비료산업협동조합 이사장
지난 호에서 우리는 독일의 농업현장을 살펴보았습니다.

오랫동안 복합영농을 실현해오던 독일의 농가에는 유독 대형 농기계가 많이 보였습니다. 한 농가에서 구입, 유지하기가 힘든 대형트랙터를 두 농가가 공동구입하여 사용하는 모습에서는 한국에서 요사이 시행되고 있는 농기계대여사업이 생각났습니다. 그러나 한국과의 근본적인 시스템의 차이는 대형농기계를 사용하기 위해서는 철저한 교육을 받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대형농기계의 운전, 수리 등 정기적 교육이수와 안전사고예방교육은 한국농촌에서 비일비재하게 발생하는 농기계사고와 뚜렷이 비교되더군요.

그밖에도 독일의 농업현장에서 배울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발전된 모습을 배우려는 열풍이 한국에서 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대학을 못가는 이가 거의 없는 무상교육제도, 보수와 진보가 함께하는 상생의 정치, 유럽의 재정위기 때도 흔들리지 않는 탄탄한 국가재정 등을 배우고자 하는 열풍입니다.

그러나 평화통일을 이룩한 ‘강한 독일’의 정치, 문화, 시스템을 배우기 위한 열풍 속에서 우리가 살펴보아야 할 부분은 단지 위에 열거된 제도와 시스템만은 아닐 것입니다.

저는 ‘강한 독일‘을 만든 진정한 원천은 독일의 역사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1970년 12월 7일 폴란드 바르샤바 자멘호파 거리의 유대인 위령탑 앞에 서독총리 빌리 브란트가 섰습니다. 그는 나치에 맞서 28일간 봉기했다가 5만6천여명의 유대인이 참살당한 기념탑 앞에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아무말없이 독일의 잘못을 온 몸으로 사죄한 것입니다.

훗날 서독총리 빌리 브란트는 “독일의 가장 치욕스러운 역사를 증거하는 곳에서 나치에 희생된 수많은 영령들을 대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말로서 표현할 수 없을 때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지금도 독일 곳곳에서는 나치가 저지른 범죄를 잊지 않기 위해 추모기념관, 조각상, 사진 등을 거리곳곳에 설치해 놓았습니다. 심지어 버스정류장에도 나치가 저지른 범죄를 보여주는 사진과 기록물 등을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바로 위와 같은 독일이 오늘의 독일을 만들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저는 유럽연수를 통해 유럽의 농업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역사도 조금은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프랑스와 독일의 2차 세계대전 이후의 나치 및 나치의 부역자에 대한 역사적 관점과 한국과 일본의 일제 군국주의 및 전쟁범죄자, 친일파에 대한 역사적 관점이 너무도 극명하게 대비된다는 사실입니다.

독일과 프랑스가 진정한 사죄와 반성, 청산을 이루었다면 한국과 일본은 역사왜곡과 변명 그리고 진심이 배제된 거짓사과 뿐입니다. 오히려 극명하게 대비되는 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아질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예를 들면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사고 이후 한국은 일본의 재앙을 먼 나라의 일인 듯 핵발전소의 확대를 고수하고 있지만 지구반대편의 독일은 핵발전소의 전면폐기를 법으로 제정하였지요.

역사가 과거만의 일이 아닌 현재의 일임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저는 이번 호를 마지막으로 농정칼럼을 마치려고 합니다. 개인사정으로 이렇게 여러분들과 만나는 소중한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 아쉽습니다. 공부도 글재주도 부족한 저에게 지면을 할애해주신 광장신문의 모든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글로나마 올립니다. 한국농업의 거름이 되는 것이 꿈인 저는 앞으로도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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