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쓸쓸한 죽음이 낳은 통한의 곡
바흐의 샤콘을 듣다보면 하늘에 닿는 고통과 슬픔을 느낀다. 바흐는 아내(마리아 바라바라)의 갑작스런 죽음 앞에서 이 곡을 썼다. 바흐는 1720년에 아내의 약값을 벌기위해 자기가 섬기던 제후와 여행을 떠난다. 하지만 바흐가 돌아왔을 때 아내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예기치 않은 이별 앞에서 아내를 병구완하지 못한 자괴감과 변변한 장례조차 치러주지 못한 통한을 담아 샤콘을 작곡하게 된 것이다.

아름다움은 슬픔을 품을 때 빛난다
샤콘은 한없이 비장하며 슬프고 우울함이 사무치는 작품이다. 오죽했으면 하늘을 울리는 슬픔이라 했을까. 나약한 한 인간의 절망에 대한 말없는 메아리다. 샤콘의 처음은 고통이고 원망이지만 마지막은 신의 위로다. 이 세상에서 위로를 받지 못해 갈망하는 우리들에게 희망과 ‘다 괜찮다’고 하는 위로가 거기에 있는 듯하다. 

샤콘은 감히 인간의 작품일까 하는 불가사의한 작품이며, 인간의 고통과 절망과 슬픔을 바이올린으로 대체해서 끝없이 묻고 또 탄식을 거듭한다. 자기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듯, 길 잃은 음의 패시지(Passage, 기악곡에서 음을 높거나 낮은 방향으로 급하게 진행하는 부분)가 이어진다. 그러다가 이런 음은 점차 따듯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풍성한 화음에 에워싸인다. 답은 얻지 못했으나, 음으로써 갈구하다 음으로서 위로를 받는다. 비로소 바이올린은 자기를 넘어서고, 마치 기도와도 같은 스타카토의 뚝뚝 끊어짐과 한 음, 한 음, 채워나가는 본질에서 나오는 울림이 이어진다.
 

▲ 검색어: 바흐 샤콘느 헨릭쉐링- 헨릭 쉐링은 폴란드 출신의 바이올리니트로서 화려하지는 않지만 원곡에 충실한 맑고 명징한 소리를 표현한 연주자로 바흐 해석에 탁월한 연주자였다. 그의 연주는 확신에 찬 단호함으로 서예의 일필휘지(一筆揮之)와 같은 머뭇거림 없는 보잉으로 바흐를 표현하고 있다. 비록 레코딩이 오래됐지만(1967) 결코 음질이 조악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프레이징, 곡의 긴장감에 맞는 비브라토의 폭과 속도, 연주자의 외모만큼이나 세련되고 기품있는 연주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드러운 카리스마를 내뿜는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바흐는 단순한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는 위로를 경험했음이 분명하며, 아이러니 하게도 우리는 한 인간의 비극을 예술의 총화로 누리고 있다. 샤콘에서는 한 사람의 세계에 어떤 따듯한 존재가 다가와서 눈물을 닦아줌을 느낀다. 그 존재(무엇인가)는 울림이고, 울림은 위로일지 모른다. 그 존재는 자기가 믿는 종교일 수 있고, 학문일 수 있고, 조상님일 수 있고 자연일 수도 있겠다. 천상의 개입, 나는 샤콘이 고통으로 일그러진 삶에 위로를 전하는 천상이 개입하는 순간을 묘사한, 완벽한 조형미와 찬란한 슬픔을 표현한 완벽한 곡이라고 믿는다.

부조니 피아노 편곡도 들어볼만
이 곡은 많은 작곡자와 연주자들에게 영감을 감명을 준 곡이기도 하다. 그중에서도 부조니가 편곡한 피아노 곡를 일청하시길 권한다. 샤콘은 바이올린의 기능과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시킨 곡이자, 정신적으로도 절정의 곡이라 하겠다.

마지막으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의 신화, 명문장으로 갈무리 하려한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래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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