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협동조합원들이 가꿔가고 있는 동아리인 ‘생활글쓰기’의 회원 한 분이 글을 보내왔다. 자신의 몸이 아파져서 97세의 노모를 요양원에 보낸 과정을 담담하게 정리한 글이다. 부모와 자식이 함께 노인으로 살아가는 고령화 시대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고 생각해 싣는다. <편집자 주>


차라리 나를 묻고 가거라”
올해 2월 3일. 우리 집에서 13년을 함께 살던 친정 엄마가 요양원에 가시기로 한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요양원 이야기를 꺼내려니 좀처럼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내가 몸이 아파 더 이상 엄마를 돌볼 수 없어서 요양원에 가셔야 한다고 간신히 말을 꺼냈다. 엄마는 별다른 반응 없이 듣고 계시기만 한다.

점심을 차려 드렸다. 밥상에 앉은 엄마가 “내가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나온다. 차라리 나를 묻고 가거라”하며 서럽게 우시는 거다. 그런 엄마에게 독일에서 간호사 일을 하고 있는 언니는 “연희가 몸이 아파서 요양원에 가셔야 해요.” 단호하게 말했다. 그날 우리 세 사람은 밥을 먹지 못한 채 요양원으로 향했다. 엄마가 서운해 하리라는 예상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마음 아파하실 줄은 미처 몰랐는데…….
 

▲ 김연희 조합원(왼쪽)과 어머니.


2003년 엄마가 우리집에 살러 오셨다
2003년 여름 남편이 큰 병을 앓다가 떠나갔다. 경기도에서 남동생과 함께 살던 엄마가 우리 집에 살러 오셨다. 엄마는 성품이 무뚝뚝하셔서 잔정이 별로 없는 반면에 잔소리도 별로 하지 않으셨다. 자랄 때는 무심한 엄마여서 불만이었는데, 오히려 무던한 엄마랑 함께 지내는 것이 편안했다. 딱 한 가지 불편한 점은 식성이 까다로워서 당신 입맛에 안 맞으면 아예 안 드셨다. 엄마랑 살다보니 ‘엄마한테 이런 모습이 있었네.’하며 예전에 몰랐던 엄마 모습을 새롭게 알아가기도 했다.

아들을 낳으려고 딸만 연달아 낳은 집의 일곱 번째 딸인 나는 어려서부터 엄마를 생각하는 마음이 언니들과 달랐다. 엄마와 시장에 가면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고 쫄래쫄래 다녔고, 자식들 도시락 반찬 싸느라 자주 김치를 담그는 엄마를 위해 확독에 고추와 마늘, 생강을 넣고 가는 일을 도맡아서 했다. 또 콩을 푹 삶아 엄마와 함께 메주도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을 도와주지 않는 언니들을 향해 엄마는 “부모 자식 간에도 일이 사랑이란다.”는 말을 자주 하셨는데, 그나마 집안일을 많이 도와 준 막내딸이 엄마한테는 더더욱 각별했을 것이다.

내가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에 부천 신혼집으로 떠나던 날 엄마가 그렇게 슬피 우는 걸 처음 봤다. 이북에 계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와 생이별을 해야만 했던 엄마는 자식과 멀리 떨어져 사는 일이 다른 사람들보다 몇 배는 더 괴로운 일로 여겨졌을지 모른다.                            


엄마가 작년 여름부터 몸이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아흔 일곱 살 나이가 무색하게 아침이면 곱게 단장을 하고 노인정으로 출근을 하던 엄마가 작년 여름부터 바깥에 나가기 힘들 정도로 몸이 어눌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장애인활동보조인 일을 그만두고 엄마 돌보는 일에 주력했다. 여태까지 한 번도 혼자 살아본 경험이 없는 엄마는 잠깐만 내가 안보여도 불안해하시는 바람에 시장을 보러 가서도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밤이면 기저귀를 채워 드렸는데도 이동식 변기에 앉아서 오줌을 누려고 서너 번씩 일어나는 바람에 난 잠을 설쳤다. 급기야 난 몸무게가 3kg이 줄고, 다리가 팍팍해 걷는 것이 힘들어졌다. 게다가 2년간 매일 두세 차례 기침이 나와서 ‘이러다가 내가 엄마보다 먼저 죽으면 어떡하지?’하는 불안감이 밀려 왔다.

언니들도 얼굴빛이 누렇게 뜨고 비쩍 마른 내 모습을 보더니 큰일 났다 싶었는지 엄마를 요양원에 빨리 모시자고 했다. 엄마가 여수쌍봉노인복지관에 다니실 적에 돌산에 있는 하얀연꽃요양원을 몇 번 다녀오고 나서 내게 좋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서 그곳으로 정했다. 아무래도 낯익은 곳이 엄마가 적응하기에 낫겠지 싶어서.
                 

표정이 점점 편안해지고 있다
요즘 난 순천에서 일주일에 한 번씩 엄마가 좋아하는 과일도 챙기고, 죽을 쑤어 요양원에 들른다. 처음 한 달 동안 요양원에서 늘 잠만 주무시고 잘 먹지 못하는 엄마를 보고 오면 마음이 혼란스러웠다. 다시 엄마를 집으로 모셔 와야 되는 건 아닌지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하지만 요즘은 엄마 표정이 점점 편안해지고 있다. 한평생 욕심내지 않고 살아오신 것처럼 천천히 요양원 생활을 터득해 나가는 엄마가 무척 고맙다.

간혹 멀리서 온 자식들을 보면 “집에 가자”고 채근하시는데, 그럴 때마다 내 귀에는 ‘이북에 있는 고향집에 가자.’고 하는 것처럼 들려 마음이 애달프다. 평소 엄마는 “우리 집 딸들처럼 엄마한테 잘하는 자식도 드물거다.”며 흡족해하시지만 일가친척 없이 외롭게 살아 온 엄마를 끝까지 우리 집에 모시지 못했다는 자책감으로부터 쉬이 벗어나지 못하리라.

하얀연꽃요양원 앞에서 여수로 나가는 버스를 타도 되지만 왠지 걷고 싶다. 20분 정도 걷다 보면 돌산 무술목 앞바다가 눈에 들어온다. 너른 바다와 아스팔트 틈새를 비집고 피어 난 민들레와 제비꽃, 꽃마리와 같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풀꽃을 보노라면 슬픔으로 뿌옇던 마음이 서서히 걷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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