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시는 여전히 농촌지역이 도시지역 보다 압도적으로 넓다. 도시문제와 함께 농촌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유이다.
외서면에서 17년 째 농사를 짓고 있는 김계수 조합원이 농촌의 일상을 전하는 칼럼을 싣는다. <편집자 주>

 

 

▲ 홀태

홀태라는 농기구가 있었다. 50여 년 전까지 농부들이 나락을 홅는 데 쓰는 기구였다. 커다란 참빗 모양의 쇠로 된 물건에 네 개의 나무 다리를 붙인 것인데, 촘촘한 빗살 사이로 볏단을 한 웅큼 펼쳐 집어넣고 잡아당겨 벼 이삭에서 알곡을 훑어내는 도구였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어머니가 이것을 마당에 펼쳐놓고 벼를 홅는 것을 보았는데 하루 종일 일을 해도 벼 몇 포대를 털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 농기구의 이름은 ‘홅다’라는 동사에서 왔을 텐데, 같은 뿌리에서 나왔을 ‘훑다’의 작은 말인 것에서 곡식을 대하는 농부들의 알뜰함이 느껴진다.

농부의 알뜰함이 묻은 이름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무렵 탈곡기가 등장했다. 굵은 철사를 듬성듬성 붙인 커다란 원통을 발로 밟는 페달로 돌려서 벼를 홅는 기계다. 이 기계에는 페달을 밟으며 나락을 홅는 장정 두 명, 그 옆에서 볏단을 한 웅큼씩 떼어내 올려주는 아낙 두 명, 뒤에서 볏짚을 묶는 남자 한 명, 기계 앞에서 지푸라기를 쓸어내고 알곡을 고르는 사람 등 모두 6명이 동원되어야 했다. 이 기계가 쓰이면서부터 벼농사의 기계화가 진행되기 시작한다.

홀태나 탈곡기로 벼를 수확하기 위해서는 낫으로 벼를 베어 사흘 정도 논에서 볏짚을 말렸다가 집으로 들여와 탈곡 작업을 하게 된다. 논에서 볏짚이 마르는 동안 볏짚에 남은 양분이 오롯이 알곡으로 전해지기 때문에 요즘 콤바인이라는 기계가 논에 서있는 벼에서 바로 알곡을 털어내는 데에 비해 쌀의 질이 지금보다 더 좋았다고 할 수 있다. 탈곡기는 벼농사 기계화의 출발점이 되었지만 전기나 석유를 쓰지 않고 오직 인력만으로 일의 효율을 높였다는 점에서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말한 중간기술의 좋은 예라 할만하다.

나락을 홅았으면 말려야 한다. 벼는 수분이 많으면 밥맛은 좋지만 변질되기 쉽고, 너무 많이 말리면 그 반대 효과가 난다. 찰벼는 좋은 볕에 사흘 정도, 메벼는 이틀 정도 말리면 적당하다. 지금은 벼를 말리지 않고 농협에 바로 판매하거나 건조기에 넣어 말리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동네 주변 도로에는 벼 말리는 굿이 펼쳐졌다. 그때는 볕이 오래 드는 곳을 선점하기 위한 경쟁이 꽤 치열해서 벼를 수확하기도 전에 미리 멍석을 갖다놓기도 했다. 당시에는 해가 저물어 어두워진 후에도 도로에 사람이나 경운기가 많아 차를 운전하는 데 꽤 신경을 써야 했지만 모든 일을 기계가 해치우는 요즘은 그런 불편도 사라졌다.

멍석도 이제는 귀한 물건
홀태나 탈곡기 시절까지 벼 말리는 데는 볏짚 멍석이 쓰였다. 두 평 남짓한 직사각형 모양의 멍석에 벼를 붓고 당글개(고무래의 지역말)로 얇게 펼친다. 한 나절 쯤 볕을 쬔 벼는 골고루 마르도록 저어주어야 하는데 그 때는 집안의 어린아이들이 맨발로 들어가 작은 발로 벼를 휘젓고 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볏짚 멍석은 무겁고 물에 젖으면 쉬 썩는다는 단점이 있기도 하지만 멍석을 짤 수 있는 사람들이 사라진 지금은 매우 귀한 물건이 되어 한 닢에 10만 원 씩 윷 방석으로 거래되기도 한다.

벼 수확이 제일 늦은 내가 도로에 나가 벼를 말릴 때는 대부분의 농부들은 나락가실을 마친 후 겨울철 소먹이로 쓸 볏짚을 갈무리하고 콩을 타작하거나 마늘, 양파 등을 심는다. 도로에 이웃한 밭에서는 배추가 오므라지면서 배가 불룩해지고 무 또한 허연 속살을 드러내며 커 간다. 밭둑에 심어놓은 감나무에서는 감이 점점 더 붉어져 마치 꽃인 양 늦가을 전원 풍경에 다채로움을 더한다. 객지에 나가 살고 있는 자녀들이 감을 얻어가기 위해 집을 찾는다.

내가 아침나절에 벼를 젓고 있는데 앞 동네 사는 초로의 부부가 지나다 말을 붙인다. 어디 가시느냐고 하니 ‘일 끝냈으니 바람도 쐴 겸. 집사람 파마도 하고’ 하신다. 잠시 후 선배 부부가 지나가며 순천만 갈대축제’구경 가자고 한다. 이른 봄부터 시작된 한 해 농사를 마쳤으니 저런 때도 있어야지 싶어 보기에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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