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여명 참가, 추모식도 가져

아시아 문학페스티벌 사전행사의 이틀째 일정으로 순천 작가회의 회원들이 여순사건 유적지 답사에 나섰다. 이들과 동행해 다크투어 현장을 취재했다.<편집자 주>


10월 29일 일요일. 오전 10시에 조금 못 미쳤을 때, 순천과 여수에서 각각 출발한 관광버스 두 대가 여수 시 (주)한국화약정문 앞 주차장에 들어섰다. 새파란 하늘과 여수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 곳은 여수 다크투어의 출발지이다. 여순사건을 주동한 14연대가 주둔했던 곳이기 때문이다.
 

▲ 여순사건을 주동한 14연대가 주둔했던  여수시 (주)한국화약정문 앞. 다크투어의 출발지이다.

아시아문학 페스티벌 사전행사

나란히 선 양쪽 차량에서 내린 사람들은 약 60 명. 순천에서 온 사람들은 대부분 전날 시낭송 콘서트에 참가했던 작가회의 사람들이다. 아시아 문학 페스티벌 사전행사의 이틀째 일정에 참가한 것. 몇몇은 자녀와 동행하기도 했다.

과거에는 정문 안 쪽 까지 들어가 유적지를 답사할 수 있었다지만, 보안이 강화됐다는 이유로 정문 앞에서 여수지역 사회 연구소 박종길 이사의 설명을 들었다.

▲ 여수지역사회연구소 박종길 이사. 사진_이정우

박 이사의 안내를 받은 답사단은 이어 서초등학교와 중앙초등학교 등의 학교 두 곳과 인구부, 만성리 위령비와 형제묘 등을 둘러 보았다. 현재도 여전히 초등학교로 사용 중인 두 학교는 여순사건 당시 부역자를 가려냈던 장소였다.

인구부는 정부군과 14연대가 최초로 전투를 벌였다는 곳이다.
 

▲ 만성리 위령비와 남해바다. 만성리는 사건 당시 살해된 사람들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곳이다. 사진_이정우
▲ 만성리 위령비

만성리는 사건 당시 살해된 사람들이 매장된 것으로 알려진 곳.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가 있다. 마래터널에서 수 백 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본래 해안가에 바짝 붙어 있는 깊은 협곡이었지만 매몰돼 있다. 바로 옆에는 해안도로가 있고, 또 세 길 쯤 아래에 도로와 나란히 달리는 폐철로가 있다. 그 폐철로 위를 관광객들이 레일바이크를 타고 달리고 있었다.

도로 옆에는 여수시장 명의로 ‘여순사건 당시 종산초등학교(현재의 중앙초등학교)의 수용자 중 수백 명의 민간인이 집단희생 된 곳’이라는 입간판이 서 있다.

▲ 형제묘. 추도식 중이다.

답사단의 일정은 이곳에서 다시 걸어서 몇 분 거리에 있는 ‘형제묘’에서 끝났다. 이 묘는 뒤엉켜진 구분할 수 없게 된 여러 시신들을 한 곳에 묻고 유족들이 붙여준 이름이다.

답사 참가자들은 만성리 위령자 탑과 형제묘에서 희생자들을 추도했다. 헌화와 묵념을 하고, 헌시도 낭독했다.

듣는 재미를 더했던 답사 해설

이 날 답사를 동반하며 해설을 맡아준 박종길 이사는 여수 지역 향토사학자로 지명연구를 오래 해왔다. “97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지만, 90년대 초반부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이력 때문에 투어과정 내내 여수에 대해 다양한 설명을 곁들여 듣는 재미를 더했다.

특히, 여순사건 당시 14연대 소속 정부군과 부대원들 사이에 최초로 교전이 이루어진 인구부의 지명이 그랬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인구부는 본래 길이 왼쪽으로 구부러져 ‘왼구부’ 였다. 그러던 것이 발음이 변해 인구부가 됐다.
 

▲ 정부군과 14연대가 최초로 전투를 벌였다는 인구부.

또 여수는 조선시대에 지명을 잃었다고도 했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킬 때 반대하던 지역이어서 조선의 태조가 된 이성계가 즉위 5년 만에 여수의 지명을 뺏고 순천부에 귀속시켰다는 이야기다. 그러니 인구부 지역은 오랫동안 여수라는 지역을 기준으로 하기보다 여수와 인근 지역을 포괄하는 좌수영을 기준으로 인식됐다. 그리고 인구부는 좌수영의 동쪽에 있는 언덕이었다. 그래서 인구부는 동쪽고개, 한자로 ‘동령’이라고 불리웠다고 한다. 동령이 좌수영의 동쪽 입구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이곳에 좌수영임을 알리는 비와 송덕비들이 즐비했었지만, 지금은 자리를 옮기고 좁은 아스팔트길만 남았다. 다른 많은 문화재와 마찬가지로 일제시대를 거치며 시련을 당한 탓이다. 그러나 다행히 좌수영임을 알리는 비석은 서울로 옮겨진 것을 누군가가 찾아 다시 인구부 인근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그는 또 답사지에 머물 때 마다 여순사건에 대한 세인의 관심이 부족한 데 대해 안타까움을 표시하며 작가들의 노력을 당부했다.

순천 작가회의 사람들을 실은 버스는 예정대로 4시가 조금 넘어 최초 출발지였던 팔마 종합운동장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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