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겨울과 올해 봄을 뜨겁게 밝혔던 촛불집회가 시작 1주년을 맞았다. 당시 집회현장에 있었던 봉사자들과 참가자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촛불 1주년’을 맞는 그들의 소감을 받아 실었다. <편집자 주> |
아직도 나에게는 하얀 종이컵 수백 개가
작년 늦가을, 노란 은행나무가 노란 촛불을 응원하듯 가로등 불빛에 반짝이던 국민은행 사거리.
깃발 없이도 참석하는 게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던 터라, 소심한 나는 아마도 두 번째 촛불집회부터 엉거주춤 참석해 끄트머리쯤에 앉았던 거 같다. 어린 학생들까지 분노에 차 마이크를 잡고 비분강개하는 그 뜨거운 열기에 놀라 허둥지둥 뭐라도 하고 싶어, 갖고 다니던 붓 펜을 꺼내 밋밋한 종이컵에 처음으로 써본 벅찬 글귀가 "다시 민주주의". 그리고는 목청껏 소리 내 외치고 싶은 구호들을 하나하나 써서 뒤쪽, 옆쪽 건네 드린 것이 캘리그라피 재능기부의 시작이 되었다. 종이 컵 몇 백 개를 구입해 미리 집에서 써가 나눠드리면서 그나마 역사의 현장에서 작은 역할이라도 할 수 있음에 신이 났다.
시민 학생들의 잊을 수 없는 온기
춥고 힘들었으나 희망으로 붉게 상기된 서로를 보며, 승리를 다짐하듯 따스한 눈빛 건네는 시민 학생들의 잊을 수 없는 온기. 오락가락 가랑비 오는 어느 저녁 행진할 때는, 팔던 우산 한 아름을 안고 와 하나하나 건네주시는 아주머니의 파이팅에 불현듯 1987년 6월 항쟁이 오버랩 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예견했다. ‘우린 꼭 승리한다!’
들불처럼 번지며 더 거대해지는 촛불의 일렁임으로 급기야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단결된 힘 하나로 촛불혁명을 완수한 쾌거. 박근혜는 탄핵되어 ‘503호‘ 수인이 되었고, 세월호의 진실. 블랙리스트의 주범, 국정원의 공작, MB의 적반하장. 밝혀야 할 적폐의 덩어리가 눈덩이처럼 커가지만, 우린 안다. 작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따듯한 마음, 낮고 덜 가진 자가 존중 받는 품격 있는 나라가 되려면 이제 어찌 해야 한다는 걸.
물론 저들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게 집요할 거라는 것도 예상 못한 바는 아니니. 그렇다고 촛불이 외쳤던 수많은 구호들이 모두 이뤄진 것도 아니고 다 이룰 수도 없다는 것 또한 충분히 알고 있다. 하지만 가슴에 꺼지지 않는 촛불 하나 켜두는 깨어있는 시민이야말로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라는 걸 명심하며 일상을 힘차게 살아내자.
"이게 나라다"라는 자긍심으로 가득한 멋진 대한민국도 우리 힘으로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알게 된 것이 촛불 국민이 가지는 가장 큰 소득이 아닐까? 적폐청산의 깃발을 더 높이 들고 더 치열하게 진실을 가려 제도로 정착하게 하는 시기. 지금은 지켜보며 힘을 실어주고 싶다. 잘못 가고 있다 느낄 때는 언제든 가슴속에 켜뒀던 촛불을 꺼내들자. 아직도 나에게는 하얀 종이컵 수백 개가 잠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