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 - 38년/박정희를 돌아본다

▲ 김경식
    행정학 박사

지금으로부터 38년 전인 1979년에 발생한 10・26사건은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대통령 박정희를 권총으로 저격하여 사망케 한 사건이다. 이후 신군부세력 등장과 12・12쿠테타, 집권과정이 현실화된 상황에서 신군부가 정권을 잡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사건은 박정희 유신체제의 종식을 초래했다는 점에서 한국사의 중대 사건이며, 유신정권 말기의 정치적 위기와 체제 붕괴를 연결하는 핵심고리이다.

1979년 10월 26일 저녁 박정희 대통령의 총애를 받던 차지철 경호실장과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갈등이 커졌다.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 도중 부마항쟁을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를 놓고 이야기를 하던 중 김재규가 박정희와 차지철을 권총으로 저격해 암살했다.

이 사건에 대해 ① 민주주의 수호 ② 권력내부 갈등 ③ 우발적 살인 ④ 미국 음모 ⑤ 최태민 관련 설 등이 있으나, 보통 민주주의 신념과 권력내부 갈등 등의 요소들이 일정 부분 다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유신체제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이 강경파라면, 김재규는 온건파에 해당한다. 온건파라 하는 이유로 ① 1977년 유신체제의 완화 건의 ② 1978년 긴급조치 해제 건의 ③ 1979년 긴급조치 9호 규제범위 완화 등 건의를 들 수 있다.

만찬장에서 박정희가 강경책을 고수하는 것을 확인한 뒤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대통령 암살을 결행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극한적 상황으로 치닫는 정국의 타파가 민주화 그 자체보다 더 절실한 것이었다. 대야 강경책이 아닌 완화책을 했을 경우에도 결행했을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재평가는 10・26사건의 본질에 가까우며, 18년간의 치적과 과실에 관한 것이다. 1961년 5.16쿠데타로 집권한 이후 1979년 10월 26일 자신의 부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 의해 암살당함으로써 18년간의 박정희 시대는 막을 내렸지만 그 시대를 회고하는 사람들의 잣대에 따라서, 세대간・지역간・직업별로 평가가 크게 엇갈린다.

박정희 시대는 민주주의가 압살되고 인권유린이 극심했던 암흑기였던가? 아니면 오늘날 민주주의의 발전과 경제 13위의 기초를 다진 국력배양과 근대화의 시기였던가? 고도 경제 성장을 이룩한 대통령, 민족중흥을 실현한 지도자 등의 긍정적인 평가와 시대에 편승한 기회주의자이자 독재자라는 부정적인 평가가 양립하고 있으며, 이러한 의견 차는 대한민국의 진보주의와 보수주의 혹은 민주주의와 권위주의, 민족주의와 반공주의 등을 가르는 하나의 상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

현재 극명하게 상반되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정책을 토대로 긍정・부정적인 양면을 보고자 한다.

긍정적인 면에서 근대화를 통해 개발독재의 정당성을 확보하여 낙후한 조국을 구제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였으며, 경부고속국도 건설, 수출 증대, 소득 증대, 저축 장려, 식량자급자족 실현, 새마을 운동 등을 통한 인프라 구축으로 일제와 한국전쟁으로 황폐화된 한국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과 조국의 근대화에 기여하였다.

부정적인 면에서 높은 경제성장은 높은 착취율에 기반한 것이며 실제 국민생활의 개선은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 있었으며, 토건 국가적인 정책이거나, GNP 성장 위주의 정책 속에서 "저임금-저곡가 체제", "자연을 마구잡이로 이용하고 파괴하는 착취 체계"의 이중의 착취 위에 건설된 것으로 경제정책은 독재의 구실일 뿐이었다고 비판한다.

현재까지 당사자인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에 대한 평가는 상반되는 현재 진행형으로 필자는 여러 학술논문을 토대로 사건의 전개 과정과 당사자들에 대한 긍정・부정적인 양면을 그대로 인용하여 과거 사건에 대한 평가는 독자들에게 맡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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