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정치권은 선거 때만 잠시 관심 있는 척

여순사건이 내년으로 70돌이 된다. 그동안 이 사건에 대한 명칭은 바뀌어 왔다.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한 해석에 변화가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필자는 여수에 살며 여순사건 연구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다. 8월에는 여순사건연구서를 새로 발표하기도 했다. 그로부터 최신의 해석과 주장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1948년 10월 하순, 항구 도시 여수는 불바다가 되었다. 잿더미가 된 거리에는 죽임과 죽음의 광풍이 휩쓸었다. 슬픈 항구 도시는 궂은비, 뱃고동 소리와 함께 나지막하게 노랫가락이 흘렀다. 여수 사람의 애달픔을 달래는 이 노래는 오래가지 못했다. 잿더미 설움을 달래는 아낙네의 구슬픈 넋두리도 “민심의 악영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세상에서 사라졌다. 항구 도시 여수는 빗발친 총탄에 도시의 흔적마저 사라졌다. 항쟁의 결과는 처참하였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살아 온 순천 사람은 어느덧 역천자로 빨간 덧칠이 되었다. 하늘의 뜻을 거스른 자로 낙인된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눈치를 살펴야 했다. 북국민학교와 농업학교에서 한마디 변명도 못한 채 타인의 손가락에 자신의 목숨이 내팽개쳐졌다. 눈먼 총소리에 고향산천은 붉게 물들었다. 하늘의 뜻에 순응하고 살아간 순천은 예전의 순천이 아니었다. 항쟁의 외침은 가혹하였다.

“제주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주둔 제14연대 병사들은 “제주 동포의 학살을 거부한다”면서 제주도 출동명령을 따르지 않고 봉기하였다. 그리고 지역주민이 동조하고 지지하면서 항쟁으로 발전하였다. 제14연대 병사에게 부여된 제주 동포 학살 명령은 군인의 사명에 부합하지 않은 잘못된 명령이었다. 권력자의 오판이 부른 부당한 명령이었다. 그러나 군인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지금껏 ‘반란’으로 간주하며 터부시하였다. 그러나 이는 국가와 군의 관점이다.

당시 제14연대 병사들과 지역주민의 관점에서는 또 다른 해석이 필요하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 주위에 맴돌고 있는 ‘빨갱이’ 악령 때문에 다른 이의를 제기할 용기가 없었다. 우리 스스로가 권력자의 문서로 남은 역사에 순응하며 살았다. 아니 순응을 넘어 스스로 반공주의자를 자처하며 충실한 국민이 되기를 원했다. 정부와 국군은 심판자로 돌변하였고 지역사회와 지역주민은 반도․폭도의 굴레를 떠안았다.
 

▲ 시신을 찾아 오열하는 유족


어느덧 여순항쟁 69주년. 내년이면 70주년이다. 여순항쟁을 아픈 역사로만 기억한다. 무고한 죽음, 억울한 죽음으로만 기억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여순항쟁은 부당한 권력과 잘못된 명령에 맞섰던 대한민국 항쟁의 역사에 서막을 열었다. 부당함에 맞섰던 동서고금의 역사와 비견하여 부족함이 없는 우리의 역사이다.

제주4‧3은 여순항쟁과 불가분
제주4․3은 여순항쟁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제주4․3은 내년 70주년을 맞이하여 “역사의 정의를, 4․3정명을!”이라는 슬로건 아래 ‘제주4․3범국민위원회’를 출범하여 활동 중이다.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다양한 사업을 준비하고, 예산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여기에 힘입어 내년을 제주 방문의 해로 정하여 제주4․3의 전국화에 노력하고 있다.

여순항쟁은 어떠한가? 10월 19일 여수에서 ‘여순사건 위령제’가 열리고, 다음날 순천에서 위령제가 개최된다. 지금껏 전라남도 도지사가 위령제에 참석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 전라남도가 앞장서서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몸짓을 본 적이 없다. 여순항쟁은 전라남도 22개 시․군에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도지사는 선거 때만 잠시 관심있는 척했다. 기초자치단체도 마찬가지이다. 시장이나 군수의 위령제 참석 정도가 그나마 위안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역사의 무지이다.

이면에는 제주도 출동 거부 행위를 ‘반란’으로 몰아세웠던 정치 권력자의 의도가 있다. 이것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 원인이다. 왜 제주도 출동을 거부했고, 왜 전남동부지역민들이 지지하고 합세했는지 따져보지 않고 오로지 ‘반란’으로만 간주하였던 족쇄가 기억의 공간에 똬리를 틀고 있기 때문이다.
 

▲ 가족의 시신을 찾는 유족

‘반란’ 인식 떨쳐내야
이제 ‘반란’의 족쇄를 풀어내야 한다. 우리의 기억에 똬리를 틀고 있는 ‘반란’이라는 인식을 떨쳐내야 한다. 1948년 10월 19일에 발발한 이 사건의 원인을 정확하게 밝혀내어야 한다. 그리하여 그에 걸맞은 정명(正名)을 부여해야 한다. 오랫동안 이 연구를 하면서 ‘여순항쟁’이라고 정명했다. 정부와 군의 관점이 아닌 제14연대 병사들과 동부지역 주민의 관점에서 역사를 분석하고 검토한 결과이다. 당연히 1차 사료를 꼼꼼히 따졌다.
 

 

여순항쟁이 발생한지 어느덧 70년이 되어간다. 이제부터라도 내년 여순항쟁 70주년을 준비하는 ‘순천시민모임’이 출범하기를 기원한다. 전남동부지역을 아울러 ‘범국민위원회’가 출범하기를 소망한다. 역사는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역사의 수레바퀴는 험난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진다.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는 독립운동가의 외침을 그저 외침으로만 기억할 때 역사는 되풀이될 수밖에 없다. 역사는 행동이며, 실천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동서고금의 역사가 우리를 깨우치고 있다. 1948년 여순항쟁의 역사를 올바르게 기억하고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순천시민의 고투를 기대한다.
 


주철희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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