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송태웅
시인
우리 마을 장인태 형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그냥 아무데에나 “희망이 절벽이여!”하고 붙여쓰기 시작했다. 마을 정자에서 장기 두는 것을 훈수할 때나 우리 아랫논의 벼에 병이 들어 원형탈모증에 걸린 것마냥 허옇게 말라죽어 가는 것을 보면서 그 말을 내뱉는 것은 그래도 좀 적절하다. 포도 차도 다 떼이고 이제 상대방의 차, 포의 협공에 속수무책인 된 채 인상을 쓰고 있는 사람에겐 희망이 절벽이고, 아랫논의 쥔 형님이 공들여 논을 돌보았지만 멸구떼의 집중 공격을 받고 초토화가 돼 버려서 희망이 절벽이 된 것은 맞는 말이었다. 그런데 둘러앉아 술을 마실 때 할 말이 떨어지면 그냥 버릇처럼 희망이 절벽이라는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이남이가 부른 “울고 싶어라”를 입에 달고 다녔다. 그래서 내가 “아, 거 형님. 울고 싶어라가 어째 통 진도가 안 나가요? 거그밖에 할 줄 모르시오?”하고 면박을 주면 대답 대신 “우울고 싶어어라”하고는 대림 시티100 오토바이를 몰고 휭 자기 논으로 사라져 버리곤 했다.

술 안 마신 날에는 거의 말이 없었다. 동네에서 지나다가 마주쳐 인사를 건네도 시큰둥한 얼굴로 지나가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술이나 한 잔 걸쳐서 거나해진 상태에서 나를 멀리서라도 본 날에는 “어이, 동생!”하거나 “어이, 대학생!”하면서 나를 불렀다. 언젠가 마을 정자 바로 옆에 있는 우리 논에 피를 뽑으러 갔더니 “대학교나 나온 사람이 뭐 묵을 게 있다고 촌구석으로 내려왔당가?”하고 면박성 멘트를 날려서 나로 하여금 할 말을 없게 만들었다.

그는 어떻게든지 나를 농민회 사무실로 끌고 가 무슨 일을 하게 만들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말이 나올 때마다 정중하게 거절하곤 했다. 시골에까지 와서 앞에 나서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나는 적막과 고요의 나라에서 은자처럼 살고 싶었고 또 그렇게 살고 있다. 가을이 오면서 마을 정자엔 사람이 보이지 않기 시작했다. 오토바이에 장화를 거꾸로 매달고 다니던 이수형 형도, ‘희망이 절벽이여’의 장인태 형도, 술 좋아하는 동섭 아우도 통 보이지 않았다. 다 어디로 간 걸까. 나는 팽나무 그늘 아래에 꼭 맞게 들어선 정자에서 하릴없이 오산과 오봉산과 계족산과 백운산의 능선만 눈으로 그려보곤 했다. 아무리 은자처럼 살고 싶다고 해도 가끔 누군가 “어이! 막걸리 한잔 허세.” 이런 말이 간절히 그리울 때도 있는 법이다.

사람이 그리울 때면 나는 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지리산 형제봉 능선에 들어서면 서시천이 섬진강과 합류하는 풍경이 손에 잡히고 곡성과 경계를 이루는 산 너머로 석양이 비칠 때면 내가 이곳에 사는 이유가 설명이 된다. 이 풍경을 나는 좋아한다. 어릴 적 어머니가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해 주실 때처럼 나는 반갑고 또한 고마웠다.

그런데 인태 형은 왜 희망이 절벽일까? 농부들에게 희망은 저 눈 앞의 봉우리처럼 위세있게 서 있지 못하고 왜 절벽처럼 막막한 모습일까? 도대체 이 나라의 그 무슨 위세와 권세가 저 선량한 농부들의 삶과 희망을 절벽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내가 만난 농부들은 힘겨운 농부로서의 삶을 하나같이 자신의 무능과 무지 탓으로 돌렸다. 그들이 정부에 대한 비판을 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쌀 수매가를 얼마에 하라는 등의 구호는 읍내에 나붙은 농민회의 플래카드에서만 볼 수 있었다. 농번기에 그들은 새벽부터 경운기 소리를 투다다타 내며 들판으로 나갔다가 해 저물녘에야 돌아오곤 했다. 그래서 저녁나절의 구판장 앞에는 그들이 끌고 온 오토바이들로 가득했다. 구판장 안을 들여다 보면 소주와 맥주와 막걸리잔들이 분주히 오갔다. 그들은 자신들의 농사일과 청년회 일들과 이웃에 대한 얘기를 할 뿐이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얘기라도 할라치면 그런 소리 마라고 손사래를 치곤 했다. 그들에게 정치란 먼 나라 얘기였다.

순박한 농민들에 의해 국회의원이 되고 대통령이 되고 도의원이 된 자들은 이런 농민들의 순박함을 역이용해서 대대손손 권력의 영화를 누리는 것이다. 나는 인태 형의 제안을 수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손에 끌려서라도 농민회 사무실에 나가야겠다고 생각을 바꿔 먹었다. 고요 속에서의 은거는 삶을 관념으로 표백할 뿐이니까. 농부들의 삶이 희망이 절벽이 아니고 희망봉으로 우뚝 서야 하니까.

추석이 지난 며칠 후 정자에서 인태 형이 마을 어른과 장기를 두는 걸 보고 나는 집에서 소주 2병하고 김치를 가지고 가서 인태 형이랑 소주를 한잔 했다. 인태 형은 여름 티셔츠를 입고서 덜덜 떨고 있었다. 나는 내가 입던 콜롬비아 등산용 남방셔츠를 벗어 인태 형에게 주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생각을 바꾸게 해 준 인태 형에게 고마움의 표시였다. 인태 형이 날카로운 콧날을 빛내며 쓱 웃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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