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수난과‘인생송별회’(16)

▲ 송기득
전 목원대 교수
친절해진 예의 그 간병사가 “교수님, 글쎄요. 제가 오늘 할머니에게 당했지 뭐예요.” “무슨 일이 있었나요?” 들어본즉슨, 간병사가 아내에게 미음을 연거푸 떠먹이려드니까, 아내가 “그것은 나의 인권침해요. 간병사의 직무유기요, 월권입니다.” 했다는 것이다. 아내는 여전히 정신이 흐려서 모든 것을 ‘잊고 사는’셈이지만, 어느 순간 정신이 맑아지면 큰 소리를 서슴지 않는 모양이다. 평소에 말이 없던 아내는 조금 화가 났단 것이다. 아내의 이 말이 간병사들에게 화제가 되었다.

얼마 전에는 아내를 돌보는 내가 간병사들에게‘논란거리’가 되었다고 들었다. “어쩌면 아내에게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우리도 늙으면 남편에게 저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나는 남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인데, 그것이 칭찬의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다만 나는 의무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좋아서, 스스로 기뻐서 하니까, 그것은 결코 칭찬받을 일이 아니다.

내가 원장과 친숙한 사이라는 것을 알아서인지, 아내는 어느덧 간호사들에게 ‘브이아이피’ 환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렇다고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런 것을 후에야 알았을 뿐이다. 원장은 병원운영에 공정하기로 소문 나 있었다. 그는 환자들을 차별하지 않았다. 내가 그를 ‘순천의 지성과 양심’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그때 마침 딸이 한가해져서 아내(어머니)를 돌볼 수 있게 되었다. 오전 10시쯤 와서 종일 어머니를 돌본다. 물론 점심을 먹이는 일을 간병사에게 맡기지 않아도 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오후에만 병원을 찾았다. 저녁에 미음을 먹이고서 어두움이 밀려오면 딸을 집에 데려다 주고 나는 돌아오곤 했다. 밤의 간호와 아침밥은 간병사에게 맡길 수밖에 없었다. 아침을 얼마나 먹었는지, 그게 언제나 궁금했다. 나는 하루 한 번만 아내에게 들러도 되어서 좀 한가해졌다. 쉬는 일 외에는 짬짬이 글을 쓸 수 있어 다행이었다. ‘신학비평’ 겨울호 원고를 쓰는 데, 주제는 ‘죽음이란 없다. 내가 죽을 뿐이다’였다. 말로의 ‘왕도로 가는 길’을 통해서 죽음을 말하려는 것이다. 나는 생명의 보장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아내에게 이 말을 들려주고 싶었지만, 정신이 흐려 있는 아내에게, 그렇지 않다고 할지라도 아직 그런 이야기는 꺼낼 처지가 아니었다. 도대체 ‘죽음’을 연상할 수 있는 말은 삼가야 했다.

나는 집에서 홀로 지내려니까 끼니 끼니가 걱정이었다. 옛날 학생시절의 10년 자취살이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럭저럭 때우기가 일쑤였다. 만일 내가 아프기라도 한다면 큰일이기에 ‘몸 돌봄’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요즈음 내가 살려고 하는 자리가 ‘하느님과 함께 노니는 것’(遊天主)인데, 이것은 사물을 즉물적으로 만나는 것이므로, 음식도 생긴 그대로 만나려고 하니 아무 음식에도 익숙해져서 부담이 없어졌다. 짜거나 맵지 않으면 가리지 않고 먹을 만큼 ‘식도(食道)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아내를 간호한 지 넉 달쯤 지나자 체중이 3킬로그램이 줄었다. 이제는 다시 3킬로가 올랐다. 실제로 아내가 보고 싶어서 기쁨으로 찾아가는 내가 살이 빠진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아내를 돌보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어서 몸에 무리가 간 모양이다.

아내는 여전히 미음을 넘기는 것과 가슴이 답답한 것과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 아내의 마음을 달래느라, 될 수 있는 대로 아내의 곁을 떠나지 않으려고 했다. 마치 어린 애기가 어머니 곁에 있어야 마음을 놓듯이, 아내는 내가 곁에 있어야 마음이 놓이는 것 같다. 아내를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일은 ‘아내와 함께 있는 것’이고, ‘아내를 평안하고 즐겁게 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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