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민숙 시인

인문학은 사랑이다. 사랑의 의미는 너무도 광범위해서 아리송하다. 인문학은 그 아리송함을 밝혀주는 촛불이다. 스스로를 태워서 스스로가 밝아지는 과정이 인문학이다. 촛불의 첫 발화시간을 점화시켜주는 매개체가 책이다. 모든 인문학적 시간들은 첫 시간이요, 첫 날이며 첫 경험이다. 그 새로움 때문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매번 책과 놀면서 살아간다.

인문학은 사랑이면서 가장 어두운 곳을 바라보는 사랑이다. 오늘 저 춥고 배고픈 사람들은 어찌 살아갈까를 생각하는 것이 인문학이다. 인문학을 한다고 하면서, 그 어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건 가짜다. 책을 즐겨 읽고 책을 좋아한다고 하면서 밝고 거대한 것, 누구나가 숭배하는 것, 세상의 오지를 바라볼 줄 모르고 화려한 그럴 듯한 것을 좋아한다면, 그건 가짜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소외된 생명에 대한 사랑이다. 그 ‘생명’에 주시하는 인간이 인문학적인 인간이다. 인문학은 나를 쇄신하는 과정이다. 이기적이며 온갖 헛된 것에 집착하며 살아온 나를 넘어서는 방법론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끊임없는 창조다!

인문학은 문제의식이다. ‘왜?’라고 묻는 일이다. 작가는 끊임없이 독자에게 묻는다. 그 물음이 한 편의 시며 소설이며 철학서이다.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사랑은 무엇인가? 사랑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 고통은 무엇으로부터인가? 저 고통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행복한가? 그 행복은 무엇으로부터인가? 세계는? 자연은? 인류의 역사는? 우리가 누리는 문명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우주는? 최초의 항해사는? 아프리카는? 그 물음들의 역학적 관계를 생각하게 하고 그 그물망 속을 종횡무진 누렸던 위대한 저자들과의 만남을 주선하는 시간이 인문학적인 삶의 씨줄이며 날줄이다.

인문학은 해답이다. 그러나 그 해답은 누구에게나 통하는 답은 아니다. 인문학은 카오스이다. 우주의 질서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주의 무질서에 동참시키는 것이 인문학이다. 무질서를 체험하지 않고는 그 어떤 질서도 참되게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참된 질서는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그건, 무질서의 고민과 무질서의 헛됨과 무질서의 좌충우돌과 무질서의 미움까지도 포용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그 카오스와 코스모스의 역정을 오랫동안 즐길 수 있는 예술적 흐름의 강물이 인문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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