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사과야”

대흥사 일지암 주지 스님인 법인 스님이 암자에 놀러온 한 아이에게 장난을 건다. 사람들이 보통 ‘바나나’라고 부르는 것을 두고, 스님은 ‘사과’라고 지칭한 것이다. 그러자 이 아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니에요. 바나나예요”

스님은 아이의 대답에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그것은 사과야”라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어른들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이거 사관데”라고 이야기한다. 그 아이는 다시 한번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아니에요. 바나나예요”

그곳에 있었던 모든 사람들이 모두 ‘사과’라도 말해도 그 아이는 끝까지 ‘바나나’라고 말했다. 그 아이에게 나는 질문을 하나 던졌다.

“왜 그게 바나나야?”
“선생님이 바나나라고 그랬어요.”

다음날 법인 스님의 장난은 계속됐다.

“배꼽이 몇 개야?”
“하나요”
“스님은 배꼽이 두 개인데?”
“엥? 진짜예요? 하난데.”
“엄마 배꼽은 몇 개야?”
“하나예요”
“스님이 보기에는 두 개인데?”
“하나예요”
“세상이 흔들리지?”
 

▲ 일지암 법인 스님

스님은 왜 아이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을까? 나는 스님이 단지 아이들을 골려 주려고 농담을 던진 것 같지 않았다.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던진 화두가 아니었을까? 스님은 우리에게 ‘우리는 무엇을 믿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 것은 아닐까?

우리는 왜 바나나를 ‘바나나’라고 하는가? 우리는 왜 배꼽이 ‘하나’라고 하는가? 그것은 사실인가? 우리는 무엇을 사실이라고 믿고 있는가? 우리가 바나나를 바나나라고 하는 것은 누군가에게 들었을 것이고, ‘하나’라는 개념도 누구에게 배웠을 것인데. 우리는 그것을 사실이라고 믿고 다른 사람들이 다른 이야기를 하면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일지암에서 노는 아이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누군가가 부정하면 우리는 저항한다. 자신의 견해가 옳다는 생각이 부정당하면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처럼 느낀다. 그것이 힘들어 우리는 그 견해를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지. 법인 스님의 농담이 나에게는 큰 ‘화두’로 다가왔다.

‘그러게, 왜 바나나가 바나나고. 배꼽은 하나이지? 그것은 사실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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