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자·의·삶·의·현·장 - 경운기 이샌 아들 이영희 씨

새벽서리 흠뻑 머금은 텅빈 들녘은 밑동만 남아있는 벼뿌리틈에서 눅눅한 볏짚냄새가 난다. 촉촉해진 논바닥 저 밑에서는 미꾸라지라도 꿈틀댈 것 같다. 동이 트지 않은 어둠속에서 트랙터 불빛 하나가 무거운 새벽을 연다. 추수가 끝난 들판에 흩어진 볏짚들을 긁어모아서 돌돌돌 말아올리는 동안 산너머로 여명이 찾아온다.

▲ 농사가 재밌다는 농사꾼 이영희씨. 이른 새벽일도 늦은 밤일도 힘들지 않다. 밤사이 뚝딱 논일이 끝나 있어서 사람들이 놀랜다. ‘잠은 언제 자는 것이여?’나락을 다 베고 나니 할 일이 없어 심심하더라. 저 논에서 뭘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볏짚작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땅은 아낌없이 주었다. 일한 만큼.
“농사도 습관이여. 술에 잔뜩 취해 잠이 들어도 세시쯤 되면 눈이 떠져. 잠이 안오면 아무 때고 그냥 논으로 나가. 서둘러 일을 끝내야 여유가 생기제.”

경운기 이샌 아들 이영희(40세)씨는 바쁜 가을을 보내고 있다. 막바지 남은 벼 수확도 해야하고 수확 후에 얻는 볏짚 작업도 끝이 없다. 도사뜰, 순천만뜰 논 300마지기 가량이 이 씨의 논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본인 땅은 10%도 되지 않는 거의가 빌려 짓는 땅이다. 300마지기 대농 이 씨가 오늘에 이르기까지는 요란한 학창시절이 있었다.

많이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살림밑천으로 경운기 한 대를 이끌고 도심도 아닌 시골마을 시골집 문간방 셋방살이를 했다. 낯선 외지인에게 붙여진 이름은 ‘경운기 이샌’이었다. 소를 대신해 경운기로 일을 해주며 받은 새경을 억척같이 모았다. 셋방살이를 면하기 위해 아들에게는 교통비 외에는 일체 한푼도 용돈이 없었다. 궁핍함을 달래려던 중학생 이 씨는 친구들과 주먹을 쓰게 된다. 오락실 고등학생을 상대로 일명 ‘삥’을 뜯는다. 그러다가 결국 다니던 중학교에서 자퇴를 권유받고 원하던(?) 남들과 다른 길을 걷는다.

저 놈 언제 사람될꼬!

어린 나이에 탈선을 했던 이 씨에게 마을 사람들은 ‘경운기 이샌 큰아들 저 놈 언제 사람될꼬!’ 혀를 찼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돈을 벌게 해주겠다고 공사판에 데리고 다녔다. 돈을 벌고 싶었던 이 씨는 반 년 막노동 일을 했지만 아버지는 노동의 대가를 하나도 주시지 않았다. 결국 이 씨는 학교를 선택했다. 다시 돌아간 학교생활은 1년 동생들이었지만 새로운 재미가 있었다.

▲ 아직 추수를 끝내지 못한 논에서 피(잡풀)을 뽑고 있다. 때론 바빠서, 때론 귀찮아서 농약을 하지 않는다.
언제 사람될까 했던 이 씨는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농기계방위산업체를 지망하여 5년 농기계와 동거동락을 한다. 군복무를 대체한 5년의 시간은 이 씨 인생을 새롭게 설계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처음에는 농사지을 생각도 없었고, 기계를 잘 아니까 농기계 장사만 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지면서 내가 농사를 맡게 된 것이제.”

농사일이 재밌느냐는 질문에 “재밌응께 하제” 답변이 시원시원하게 돌아온다. 하지만 나는 자꾸 의심이 된다. 농사란 단어만 들어도 허리부터 뻐근해 온다. 논에 새참이나 나르고 막걸리 심부름만 하던 나지만 농사가 녹녹치 않음은 너무 잘 안다. 그런 농사가 재밌단다.

“친구들 만나면 그런 소리를 해. 뭐할라고 힘들게 농사 짓냐고. 그럼 나는 이렇게 얘기하제. 니가 직장생활하는 것이나 내가 농사짓는 일이나 다를 것 없다. 돈 버는 재미도 그렇고 사람 비유 맞춰야하는 일도 그렇고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스트레스는 없다고”

이 씨는 말한다. 소농을 하려거든 취미삼아 하거나 운동삼아 하는 일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벼농사로 돈을 벌 생각은 애초에 하지 말아야 한다. 그나마 대농은 먹고살만 하지만 소농은 답이 없는 것이란다.

이 씨의 1년은 온통 논에서 보낸다. 봄이면 볍씨를 준비해서 모를 심고 가을 추수가 끝나면 축산농가에게 보낼 볏짚 작업을 한다. 볏짚을 거둬들이면 텅빈 논에 소 여물이 될 풀씨를 뿌린다. 찬바람 불기 시작하는 가을 겨울이면 작업해 둔 볏짚을 주문처에 운송하고, 그사이 훌쩍 자라난 소풀은 5월경에 베어내고 바로 다시 모를 심는다. 쉬는 기간은 겨울철 한 달가량. 이때는 이 씨가 좋아하는 낚싯대를 잡을 수 있는 기간이다.

겨우 대출금 갚고 나면 새 기계 사야 돼.

도심에서 팍팍한 삶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귀농을 생각해봤을 것이다. 내가 일한 만큼 얻을 수 있고, 땅은 속이지 않는다는 말. 이 씨도 말한다. 농사가 재밌는 것은 내가 고생한 만큼 얻어지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이 씨는 덧붙여 말한다. 내가 농사로 돈을 벌 수 있는 건 다른 사람 손을 빌리지 않고 내가 일을 하기 때문이고, 나에게 기계가 있기 때문이고, 그 기계를 다룰 줄 알기 때문이라고.

▲ 베트남에서 시집 온 아내 린과 아들 이광준. 이 씨의 행복이고 희망이고 미래이다.
이 씨는 농기계를 수리해서 오래도록 쓸 수 있어 농기계 구입은 중고로만 한다. 그가 이문을 남길 수 있는 조건이다. 1억 2억 되는 새 기계를 사면 길어야 5년을 쓰는데 겨우 대출금 갚을 즈음돼서 다시 새 기계를 사야 한단다. 결국 투자한 것밖에 얻지 못한다는 얘기다. 그래서 대부분 농가는 벼농사만으로는 답이 없으니 하우스를 겸하고 있다. 기계활용과 함께 추수 이후에 손을 놓고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쌀값은 올릴 수가 없는 것이여. 물가는 해가 다르게 팍팍 오르는데 쌀값은 올라봐야 1~2만원 올라. 그렇다보니 쌀을 팔아서 돈을 벌겠다는 생각은 할 수가 없는 것이제. 그래서 나는 쌀값이 오르든 내리든 신경쓰지도 않고 기대하지도 않아. 다만 나는 그 논을 활용해서 부가수입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고. 소풀을 지으면 평당 보조금도 나오거든. 보조금이 있으니 소풀재배도 할 수 있고.”

정부나 시보조 사업이 5년정도 지나면 바뀐다고 한다. 해마다 보조금지원사업은 실시하지만 지원하는 작물의 종류가 바뀐단다. 지금은 소풀재배농가에 보조금을 지원해주지만 이 일이 5년 정도 지나면 다른 재배작물로 바꿔야만 한다. 예를들어 사료용 옥수수재배로 바뀐다. 강원도가 현재 옥수수작물로 바뀐 상태다. 작물이 바뀌면 사용되는 농기계가 바뀌어야 한다. 2억 가량 되는 기계를 다시 구입해야한다는 이야기다. 그것도 하나가 아닌 2~3종의 세트 기계를 함께.

“결국 서로서로 먹고살자는 얘기제.”

서로 공생하자고 해서 5년 주기로 정책이 바뀐다는 것은 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늘 농가가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는 현실. 쌀 수입개방으로 더욱 힘들어질 수밖에 없는 현실. 이 힘겨운 현실을 극복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오늘도 이 씨는 텅빈 들녘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저 논과 함께 무엇을 해야할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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