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06. 15. 담양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에 다녀왔다. 

12. 28. 일본군 ‘위안부’ 합의 무효화, 피해 할머니들의 명예와 인권 회복,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죄와 배상을 바라는 마음으로 평화의 소녀상이 제막되었다. 담양은 인구가 47,136명의(2016년 기준) 군 단위다. 

이 작은 군에 평화의 소녀상이 건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성원하는 마음을 전하고자 참석했다. 담양군에서는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하는 데 3천만 원을 지원해 주었고 코흘리개 아이들부터 어르신들이 한마음으로 5천만 원이 넘는 금액을 모금했다고 했다. 

각계각층에 배부되었던 저금통에는 3천만 원이 넘는 동전을 모금해 주셔서 밤낮으로 동전 세기에 여념이 없었다고 한다.

대한민국에서 예순여덟 번째, 김승애 담양 평화의 소녀상 집행위원장의 사회로 ‘담양여중 대나무 소리 합주단’과 ‘담양남초등학교 청죽골 판타지아 합창’을 시작으로 담양 평화의 소녀상 제막식이 있었다. 

“고통 같은 전쟁 속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면서 가장 많이 불렀을 엄마,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을 잃고 식음을 전폐했을 아버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는 박영자 상임대표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제막식이 시작되었다.

 
 

 

 

 

손순용 상임대표는 “담양에 ‘위안부’ 할머니가 살아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많이 송구스러웠다.”라는 말씀과 함께 “뚜벅뚜벅 걸음마를 시작하는 어린아이들부터 어른들까지 적극적인 협조로 이 자리에 왔으며 전국에 많은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진 것을 보고 앞으로의 미래 세대인 어린아이들에게는 이러한 역사를 다시 되새김질해서는 안 된다.”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최형식 담양군수는 “소녀상 건립의 가치는 인권의 명예를 지속해서 관심을 가지고 모두가 차별 없는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는 나라를 만들고 잃어버린 아픈 상처는 평화가 오고 전쟁이 없는 진정으로 통일된 나라로서 독립된 나라가 되었을 때 소녀상 어머니의 마음이 치유될 수 있다.”라고 말했다

 

▲ 최형식 담양군수

김기성 군의회 의장은 “과거의 아픔을 절대 잊지 말고 작은 마음들이 모여 저금통에 동전으로 모인 것은 소녀상에 대한 의미를 깊이 되새기는 마음과 서로의 애달픈 마음을 잊지 말고 함께 하자는 의미로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광주광역시에 유일하게 생존해 계신 곽예남 할머니 근황에 대한 간단한 소개도 있었다. 다를 때는 거동조차도 힘들어하실 할머니께서 그날은 많이 웃으시고 밝은 모습을 보여줘서 보는 이들도 함께 기쁜 마음이었다. 그리고 담양군수를 비롯하여 군민, 곽예남 할머니, 학생들이 함께 하얀 보자기에 달린 긴 끈을 잡은 후 당기자 ‘평화의 소녀상’이 모습을 나타냈다.

김서경, 김운성 부부 작가가 소녀상 작품 설명을 해주었다. 평화의 소녀상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빈 의자에 대해서 특별히 설명해야겠다며 자세히 설명해줬다.

“이백서른아홉 분의 용감한 외침이 이제 서른여덟 분이 되었지만 떠난 자들의 자리를 내가 메우면서 역사의 아픔을 함께 나누고 우리의 평화를 지키겠다는 다짐을 해 보는 자리”라고 하면서 “빈 의자에 앉을 때는 소녀의 손을 꼭 잡아주었으면 한다.”라는 당부의 말씀도 잊지 않았다.

김숙자류 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이 공연됐으며 목포 출신 가수 ‘인디언 수니’가 나와서 축하 공연을 펼쳤다.

기타를 치면서 ‘찔레꽃’, ‘동백 아가씨’, 자작곡인 ‘시베리아’ 노래를 불렀다. 찔레꽃 가사는 많은 사람의 마음을 울적하게 했다.

“가을밤 외로운 밤, 벌레 우는 밤 초가집 뒷산 길 어두워질 때 엄마 품이 그리워 눈물 나오면 마루 끝에 나와 앉아 별만 셉니다.”

고향에 계시는 엄마 품이 그리워서 고향 쪽을 바라보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지 생각을 하니 내 마음도 짠해져서 울컥 설움이 밀려왔다. 한때 아이였고, 꽃다운 소녀였으며, 여자였던 할머니들을 생각하면서 동백 아가씨를 부른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창평중학교 평화 나비’ 학생들이 ‘가장 늦은 통일을 가장 멋진 통일로Ⅱ’, ‘경의선 타고’ 노래에 맞춰 플래시몹을 펼쳐 보인 후에 행사를 마쳤다.

담양에 건립된 평화의 소녀상이 지역민에게 사랑을 받고 더 나아가서 그곳을 찾는 많은 사람에게 관심을 받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여기, 곽예남 할머니의 삶에 관해서 이야기를 보태고자 한다.

“집에 가야 하는데……”

현재 우리나라에는 ‘위안부 할머니’ 서른여덟 분이 생존해 계시는데, 전남·광주에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는 분이 곽예남 할머니이시다.
 

▲ 곽예남 할머니

1924년 담양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1939년 16살 어느 봄날, 대여섯 명의 동네 또래 동무들과 들에서 나물을 캐다가 동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본군들에게 끌려갔다.

동무들은 풀려났지만, 소녀 혼자는 풀려나지 못하고 덜커덩거리는 기차에 몸을 싣고 몇 날 며칠을 달려간 곳이 중국 땅 만주였다.

소녀의 아버지는 소녀가 갑자기 끌려가서 사라지자 그 충격으로 화병에 그만 그다음 해 2월에 돌아가셨다. 그리고 소녀의 어머니는 평생의 소원이 딸을 찾는 것이었지만, 끝내 끌려갔던 딸을 잊지 못하고 눈을 감으셨다고 한다. 소녀는 중국에서 ‘위안부’ 생활을 하시다가 그곳에서 자식이 있는 남자에게 재취 자리로 가서 남자의 자식들을 키우면서 19년을 사셨는데, 할머니에게는 자식들은 없으셨다고 한다.

그 후 중국에서 60년을 생활하시다가 할머니가 80세 되시던 2004년 6월 4일에 대한민국으로 오셔서 담양에 정착하셨다.

가족들을 찾는 방송 프로그램을 통해서 1년 반이라는 세월이 흐른 뒤에 가족들을 찾았지만, 이미 부모님, 형제들은 고인이 되신 후였다.

할머니는 “집에 가야 하는데……. 밭에 가시고 아버지는 논에 가시고 나는 집을 본다.”라고 하시는 등 할머니의 마지막 기억은 16세 소녀의 기억이라고 한다.

열여섯 살 소녀가 여든의 나이에 고향으로 와서는 제일 처음 찾았던 곳이 소녀가 살았던 초가지붕이었지만, 그 터만 있을 뿐 부모님, 형제랑 살았던 초가는 흔적도 남기지 않고 없어져 버렸다.

그리고 중국에서 오시고 담양에 정착하신 지 2년이 지난 후 할머니는 치매가 왔다. 할머니는 기억 속에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만 찾으시면서 보따리를 싸시고는 나가신다고 하신다.

보따리를 싸신 것은 아마도 끌려갔을 때 보따리를 그 어린 가슴에 안고 부모, 형제와 작별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던 기억으로, 원망 어린 소녀의 마음과 생각이 사무치도록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토록 뼈에 사무치고 그리웠던 고향의 초가가 생각나서일까? 초가에서 사시겠다고 하신 것을 보니, 비록 작고 허름하며 남루하여 초라하기 그지없는 초가에서 열여섯 해를 지내는 동안 얼마나 많은 추억과 그리움이 있었으면 그 집을 잊지 못하고 그렇게도 애타게 찾고 싶어 하셨을까 생각을 하니 눈물이 저절로 났다.

지금도 아버지, 어머니, 큰오빠만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남자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남자 중에서도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생긴 남자들을 보면 더 경계하시면서 밖으로 나가라고 하기까지 하신다는 이야기를 듣자니, 숨기고 싶었던 ‘위안부’ 생활하실 때의 고통스러운 기억과 분노가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꾸역꾸역 치밀어 올라오는 것은 아닌가 싶어 더욱 가슴이 아프다.

특히, 일본말을 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는 눈빛이 변하고 태도가 달라지며 몸이 경직되고 자세가 다르다고 하셨다. TV를 보시다가 폭력적인 장면이 나오면 그대로 따라 하시기도 하고 악역을 맡은 사람에게는 “저놈 죽여야 한다.”라고 하신다는 것이 아마도 ‘위안부’ 생활에 따른 기억의 잔재가 고스란히 남아있으신 것은 아닌가 싶다.

또한, 초를 엄청 귀하게 여기신다고 했다. 전깃불은 종일 켜 놔도 괜찮지만, 초는 잠시도 켜 놓으신 것을 못 보신다고 하셨다. 할머니는 중국에서 발병한 피부세포암 때문에 2014년 10월에 제거 수술을 했으며 두 달 후 12월 3일에는 폐암 4기 판정을 받으시고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으셨으나, 지금은 그래도 건강한 편이라고 했다. 더 악화하지 않으시고 치료할 약도 없으니, 집에 모셔서 드시고 싶은 것 드시게 하고 편하게 돌아가실 수 있게 모시라는 것이 의사 선생님의 소견이었다는데, 의학적으로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이라고 했다고 한다.

현재 할머니께서는 나이, 생일을 기억하지 못하시고 연이틀을 주무시고 난 후에는 연이틀을 깨어있지만, 시각적으로는 아침, 점심, 저녁만 인지하고 계신다고 한다.

지금은 할머니의 여동생 아들이신 조카가 돌보고 계신다.

할머니 보시기에 조카가 큰 오빠를 많이 닮았는지 ‘오빠’라고 하신단다. 얼마나 보고 싶고 사무치게 그리웠으면 조카에게 ‘오빠’라고 부르실까 생각을 하니 코끝이 시큰거려진다.

할머니는 요양원에서 생활하시면 더 좋은 의학적 도움을 받을 수 있지만, 살아도 집에서 살고 죽어도 집에서 죽고 싶다고 하셔서 담양군 대덕면 용대리 산골짜기에서 조카와 함께 생활하고 계신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글을 읽으신 분들도 함께 마음속으로 기도해 주었으면 한다.

 “곽예남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2015년 12월 28일 ‘위안부’ 합의는 전면 무효로 하고 일본의 진실한 사과와 보상이 꼭 이루어지길 바라면서 끝을 맺을까 한다.

추신: ‘위안부’에 작은따옴표를 표시하는 이유는 범죄를 축소하는 완곡한 표현이지만, 그 역사적 실재성을 드러내기 위해 사용되고 있으며 범죄의 주체인 일본군과 이것이 역사적 용어라는 바를 꼭 밝히기 위해 작은따옴표를 붙여 표기함
.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