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의 특진, 두 개의 무공훈장
인천상륙작전의 산증인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6·25전쟁이 일어난 지 올해로 67년이 됐다. 그런데 그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쟁을 이만 끝내자는 것이 아닌, 잠시 쉬자는 의미의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도 벌써 64년이나 되어간다. 당시 우리나라는 끝까지 휴전을 반대했다. 그래서 전쟁 당사국이었던 우리나라가 빠진 상태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그래서인지 정정협정문 끝에, “1953년 7월 27일 10시에 한국 판문점에서 영문 한국문 및 중국문으로 써 작성한다. 이 3개 국어에 의한 각 협정의 본문은 동등한 효력을 가진다.”라고 되어 있으며, 서명자도 마크 W. 클라크(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미 육군 대장), 김일성(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팽덕희(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세 사람뿐이었다.

정전협정 서명식에 참석한 사람도 윌리암 K. 해리슨(국제연합군대표 미 육군 중장), 남 일(조선인민군 및 중국인민지원군 대표 조선인민군 대장) 둘이었다.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으로 나라가 없어질 뻔했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데는 유엔의 깃발 아래 동참한 참전국 용사들의 헌신도 자리 잡고 있다. 그 당시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 작고 가난한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싸운 그분들을 기억하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얼마 전에는 올해 34살인 재미교포 2세 ‘한나 김’ 양이 개인적으로 20여 개 국가를 돌며 아직 생존해 계시는 참전용사들을 만나고 왔다는 뉴스를 접했다.

이에 순천에 살고 계시는 참전유공자 한 분 한 분을 찾아뵙는 심정으로 6·25참전유공자 한 분을 만나보았다.

경로효친 액자와 삼강오륜이 벽에 걸려 있는 순천경로당에서 기다리고 계시던 안계수 어르신을 뵙자마자 거수경례로 ‘충성!’이라고 예의를 갖추었다. 그래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87세라는 연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정정하여 마치 청년처럼 패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 순천경로당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시던 안계수 어르신, 눈빛이 청년 같았다.


▶ 귀신 잡는 해병, 해병대 1기생이라면서요?

1949년 4월에 입대했는데, 당시 순천에서 중학교를 졸업하던 해(年)에 ‘공부를 하고 싶은 사람은 해군에 지원하라’는 해군 모병 포스터를 보고 학업을 계속할 수 있다는 생각에 해군에 지원 입대했습니다. 그런데 그즈음에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해병대(육지에서도 싸우고 바다에서도 싸우는)가 창설되면서, 약 3,000여 명 해군 13기 중에서 선발되어 300명 해병대 창설멤버로서 ‘귀신 잡는 해병’이 되었습니다.

▶ 해병대 훈련이나 참전 경험자로서 한 말씀?

해병대에 배치된 이후 첫 번째 작전은 지리산의 빨치산 토벌 작전에 투입되었고 1949년 11월 제주 4·3사건 진압을 위해 제주도에 투입되던 중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당시의 해병대 훈련은 15개월 정도였는데, 비행장 활주로에서 받은 포복훈련이 가장 기억에 남고 그때 피투성이가 된 팔꿈치를 바닷물에 담그며 쓰라린 고통을 참아내야만 했습니다.
6·25전쟁 때 해병대가 첫 작전에 투입된 것은 인천상륙작전이었는데, 우리는 맥아더 사령관이 지휘하는 UN군과 함께 부산에서 집결하여 인천상륙작전에 투입됐습니다.

서울 탈환 후에는 목포로 이동했고, 1950년 10월에 다시 원산상륙작전에 투입되었습니다.

참전 경험담을 들려주는 내내 스물일곱 청년과 얘기하는 듯했다. 강렬한 눈초리가 아직도 생생하다.
 

▲ 날씨가 무척 더워서 아이스크림을 사다 드렸더니, 오면 주려고 준비하셨다며 ‘두유’ 하나를 꺼내주셔서 어르신과 함께 감사한 마음으로 받아 마셨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 경험이 있다면요?

수많은 전투 중에서도 강원도 양구 ‘도솔산 전투’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당시 ‘김일성 고지 전투’라고도 불렸는데, 너무나 많은 전우를 잃었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얼마나 피곤했던지 자고 일어나보니 죽은 사람의 다리를 베고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전투에서 죽은 전우들이 지금도 가끔 생각나고 보고 싶습니다.

몇 년 전에 양구 일대 전적지 방문을 한 적이 있는데, 당시 치열한 전투과정에서 잃어버렸던 전우들을 생각하며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 보통 사람은 하나 받기도 어려운데, 무공훈장을 두 개나 받았습니까?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및 경기·서울지구 전투 당시에 해병대 2대대 6중대 1소대 선임하사관이었는데, 국방부 장관으로부터 금성 충무 무공훈장을 받았고 1952년 12월 22일 강원도 양구 도솔산 전투 및 김일성 고지 탈환 전투에 해병대 2대대 6중대 선임하사관으로 참전해서 또 금성 충무 무공훈장을 받았습니다.
 

▲ 본인이 받은 기장, 훈장 등의 증명서인데, 모두 수십 년 세월을 안계수 어르신과 함께하고 있다고 하셨다.

▶ 6·25전쟁 정전 후에도 군 생활을 계속하셨습니까?

휴전 후에도 휴전선 일대에서 계속 근무하다가 1956년 2월 29일에야 전역할 수 있었습니다. 해병대로서는 20번째 군번인 9100020으로 군 생활을 시작하여, 전역할 때까지 단 한 번도 전선을 떠나지 않고 현재의 원사 계급으로 군 생활을 마감했습니다. 현재 해병대 1기생 300명 중 27명이 생존해 있는데 전라남북도, 제주를 통틀어 혼자 살아 있습니다.

전역 이후 공무원을 거쳐 회사 생활을 마치고 해병대 전남연합 초대회장, 6·25참전 유공자회 순천지회장 등을 지냈고, 큰아들도 해병대(267기) 출신이라고 했다.

▶ 순천에 6·25 참전용사기념탑이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예, 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 2003년 10월 8일에 순천시재향군인회가 순천시의 도움을 받아 6·25전쟁 제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3년여의 기간 동안 적극적으로 추진해 건립한 ‘6·25 참전용사기념탑’은 부지 1,805평, 높이 8.5m의 탑으로 기단에는 순천 출신 6·25 참전유공자 1,828명의 명단이 음각되어 있습니다. 현재 그중 500명 정도만 살아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어디에 있는지 잘 모릅니다. 안타깝습니다.

▶ 6·25 참전유공자로서 바라는 것이 있습니까?

이제 제발, 매년 6월만 되면 듣는 얘기,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편안하고 부강한 나라에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르신들 덕분입니다.”라는 말 더는 듣기 싫습니다. 

6·25 참전유공자들에게 정부의 더 크고 지속적인 지원이 있어야 하는데, 아쉽습니다. 나라를 위해 젊음을 바친 그분들의 명예를 높이는 데 국가가 더 애써야 합니다. 그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어야 하며, 미래 세대들이 그 숭고한 뜻을 이어나가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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