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조계산 피아골

▲ 김배선 향토사학자

우리나라에서는 ‘피아골’을 이야기하면 지리산의 골짜기를 떠 올리게 된다. 지리산 피아골은 구례군과 하동군의 접경인 연곡사 뒤편에 있는 빼어난 단풍으로 이름난 삼홍소가 있는 깊은 골짜기이다.

많은 사람이 ‘피아골’ 하면 아름다운 계곡과 단풍을 연상할지 모르겠지만 ‘피아골’이라는 이름은 역사적 사건을 통해 태어난 이름이다. 많은 사람이 ‘피아골’이라는 이름과 어원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대개 한국전쟁과 전쟁 전후의 빨치산 토벌작전 과정에 많은 사상자로 인해 시체가 산을 이루고 피가 내를 이뤘기 때문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는 ‘피아골’의 정확한 어원이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은 ‘피아골’이란 이름의 연원이다.
송광사의 수장고에 보관 중인 1920년대 초의 기록물에 나타난 골짜기들의 이름에 따르면 ‘피아골’을 ‘피액동(避厄洞)’으로 표현하고 있다. 인암 스님이 생전에 그렸다는 산 그림(지도)에는 ‘피아골’로 표기되어 있다. 즉 ‘피액동’이 ‘피아골’인 것이다. ‘피액동’의 한자어를 풀이해 보면 ‘避(피)’는 피한다는 뜻이며 ‘厄(액)’은 재앙으로 전쟁이나 난리와 같은 화를 말하고, ‘洞(동)’은 골짜기로 첩첩산중이라는 의미이다. 청학동을 청학골, 대성동을 대성골이라 하는 것처럼 ‘동’이라 하지 않고 골로 발음했다. 

그러므로 ‘피액동’이란 난이나 화를 피해 사람들이 숨어살았던 깊은 산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그러나 어느 시기에 무슨 액과 관련된 이름인지는 알 수 없다.

피액동이 피아골로 발음되는 과정을 살펴보면 사람들이 난이나 액을 피해 숨어살던 곳이라 하여 식자들이 피액동으로 지칭한 곳을 글을 모르는 사람들은 피액동이라 하지 않고 피액골이라 불렀으나 발음상 자연스럽게 액의 ‘ㄱ’이 탈락되면서 ‘피애골’이 되었다가 다시 발음의 연결이 ‘피애’보다 부드러운 ‘피아’로 바뀌어 피아골, 즉 피액동 → 피액골 → 피애골 → 피아골의 순으로 바뀐 것으로 설명할 수 있다.

▲ ① 홍골성단 피아골 입구 ②빨치산 은신처인 돌담  ③빨치산 은신처인 피아골 숯가마 ④숯가마 앞 보초 담


조계산의 피아골이 지리산의 피아골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나 그것은 피아골이라는 이름의 뜻을 모를 때 지리산의 크기와 유명세에 따른 편견일 수 있다. 지리산의 피아골이나 조계산의 피아골 모두 뜻은 같지만 어느 시기에 어떤 ‘피액’ 때문에 그와 같은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선후를 구분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산 중에는 난을 피한 곳이라는 의미의 ‘피아골’과 비슷한 이름이 많다. 조계산을 안내하는 산에 관한 책들에는 대부분 빠짐없이 피아골이 등장한다. 하지만 위치가 정확하게 안내되지 못한 점이 아쉽다.

조계산의 피아골은 송광사 쪽의 대표적인 골짜기로 알려진 홍골의 끝자락에서 왼쪽으로 나뉘는 막다른 골짜기이다. 피아골로 가려면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가는 길에서 송광사로부터 약 1km 지점(비룡폭포 입구에서 약 50m 위의 개울에 놓인 홍골 입구다리를 건너)에서 왼쪽 비탈길을 따라 올라가 홍골로 들어가야 된다. 그러므로 피아골과 홍골의 입구는 같다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길은 홍골 입구 다리를 건너기 직전 왼쪽 비탈을 따라가다 능선으로 올라서 홍골 왼쪽 비탈을 타고 돌아가는 길이 있다. 예전부터 나무꾼들이 다녔던 길이다. 그러나 조계산을 안내하는 일부 책에 홍골의 다음 골짜기인 토다리 삼거리에서 왼쪽 정상으로 오르는 등산길을 ‘피아골 입구’로 표기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표기이다. 원주민들은 토다리 삼거리를 ‘국골’ 입구라고 부른다. 
조계산의 정상과 효령봉(연산봉)으로 오르는 등산로인 이 골짜기의 이름이 송광사 쪽의 홍골과 더불어 양대 골짜기인 굴 등골이 변해서 된 국골이기 때문이다.

조계산의 피아골은 이름처럼 숨기에 알맞은 깊은 골짜기임을 증명하듯 1948년 한국전쟁 전후 조계산으로 숨어든 빨치산 부대가 은신했던 곳이므로 이들을 잡기 위한 토벌작전이 마지막까지 전개된 곳이며, 많은 빨치산과 토벌대가 죽은 곳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도 피아골의 중심에는 빨치산 은신처였던 원형 돌담이 있고, 골짜기 입구에 있는 숯가마 터를 그들이 사용했다는 증거로 사람 앉은키 높이의 경비를 세웠던 돌담이 남아 있다.
피아골에 빨치산 본부가 있었던 것은 단순히 골짜기가 깊었기 때문이 아니라 뒤편의 능선이 송광사의 백호줄기로서 아래로는 송광사와 신흥(접치) 오두재로 내려가는 길이고, 넘어가면 접치의 먼 골이 나온다. 위로는 조계산의 정상과 장박골로 넘어가는 말발굽 능선에 가깝기 때문에 지리적으로 장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빨치산 토벌이 끝난 이후 민간인들의 입산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195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 피아골에서는 총과 탄환 등이 나무꾼들에게 발견되었고, 1980년대까지도 유골과 포탄, 녹슨 탄통 등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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