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에 오바바 전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에서 국제 행사를 훌륭하게 개최한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질문의 우선권을 주었는데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던 사건(?)은 아직도 큰 충격으로 남아있다.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중국 기자가 일어나서 우리나라 기자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질문 기회를 얻었다. 이 사건이 있은 후에 질문이 중요 업무이기도 한 기자들마저 질문을 하지 못 하는 우리나라 교육에 대해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EBS 방송은 <왜 우리는 대학을 가는가?> 라는 다큐를 제작하여 초 중고부터 대학 강의실까지 질문을 찾아 취재를 했으나 중학교 이후에는 교실에서 질문이 없었다. 질문을 언제 해봤는지 묻는 질문에 학생들은 기억이 안 나거나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로 기억을 거슬러 갔다.
 

『몰라쟁이 엄마』/ 이태준 지음, 신가영 그림  / 우리교육


우리는 왜 질문을 안 하게 됐을까? 이태준 작가의『몰라쟁이 엄마』(우리교육)에서 노마와 노마 엄마를 만나면서 그 답을 조금 찾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대화로만 이루어진 동화로 1931년『어린이』지에 발표되었다. 아침에 참새 소리를 들으며 엄마 곁에 있던 노마가 엄마에게 질문한다. 
“참새두 엄마가 있을까?” 
“있구말구” 
“엄마 새는 왕샐까?” 
“그럼 거 크단다. 왕새란다.” 
“그래두 참새들은 죄다 똑같던데 어떻게 저의 엄만지 남의 엄만지 아나?” 
“몰-라.” 
“참새들은 새끼라두 죄다 똑같던데 어떻게 제 새낀지 남의 새낀지 아나?” 
“몰-라.”

아이가 참새 소리에 참새를 쳐다 본거다. 참새들이 줄줄이 앉았는데 아무리 자세히 봐도 죄다 똑 같은 게 신기하기 만하다. 참새도 엄마도 할아버지도 있고 자기처럼 아이도 있을 건데 아무리 찾아봐도 모르겠는 거다. 노마는 궁금한 것을 바로 곁에 있는 엄마한테 물어 본다. 참새도 엄마랑 새끼가 있단다. 그런데 그걸 어떻게 구분하는지는 모른다고 한다. 아이는 그 다음 질문으로 이어간다. 
“참새두 할아버지가 있을까?” 
“그럼!” 
“할아버지는 수염이 났게?” 
“아-니.” 
“그런데 어떻게 할아버진지 아나?” 
“몰-라.”

할아버지 새가 수염은 안 났다는데 할아버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엄마도 모르니 아이는 궁금한 것이 해소가 안 된다. 하지만 아이는 정말 알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에 질문을 멈출 수가 없다. 엄마가 이것만은 꼭 알려주길 바라며 다시 질문을 이어간다. 
“참새도 기집애새끼하구 사내새끼하구 있지?” 
“있구말구.” 
“그럼 참새두 사내새끼는 머리를 나처럼 빡빡 깎구?” 
“몰-라” 
“이런! 엄마는 몰-라쟁인가 죄다 모르게”

노마가 정말 궁금한 것은 자기가 머리를 빡빡 깎는 이유일 거다. 자기는 여자친구와 달리 왜 머리를 깍는 것일까? 여자 남자를 구분하기 위한 것일까? 자기 몸에 대해 관심이고 몸에 대한 결정권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이다. 머리를 깎는 것이 여자 남자를 구분하기 위하여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일인지, 자기가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한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과 세상에 대해 알고 싶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며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간다. 그래서 모든 신화와 철학은 ‘사람은 어떻게 만들어 졌는지, 세상은 어떻게 생겨났는지’에 대한 질문과 답을 찾는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것은 지금 어떻게 살아갈지에 대한 고민, 생각에서 비롯된다. 노마의 질문은 스스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으로서 아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다. 여기에 부응하는 엄마가 있다. 함께 살아가는 존재로서 엄마는 노마의 질문에 진지하게 반응한다. 자신이 아는 것은 명확한 의견으로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밝힌다. 그러니 노마는 계속 질문할 수 있고 해소되지 않은 질문은 다른 질문으로 이어지거나 여전히 노마의 몸속에 남아 언제든 그 답을 찾을 기회를 보고 있는 것이다. 엄마도 노마 덕분에 새로운 질문을 안게 됐다. 교실이나 사회에서 어떤 질문도 없는 것은 스스로 생각하며 사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주변에 대한 다정함과 관심이 없는 것이다.

대학생들에게 왜 질문하지 않냐고 물었을 때, ‘틀려서 이상하게 볼까봐 걱정이 되요.’‘다 안 하는 분위기니까요.’ 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공부를 하면서 궁금한 것이 없다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불러주는 것을 암기하거나 받아 적는 것밖에는. 그런데 우리 부모나 교사가 아이들에게 그걸 강요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노마의 엄마처럼 모든 질문에 진지하게 경청하고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쓸데없는 질문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고 쓸데없는데 신경쓰지 말고 시키는 일이나 잘 하라며 아이들의 궁금함을 겁주고 평가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있다. 어른이라는 이름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평가하면서 질문을 제거했던 것이다.

1923년 5월 1일, 어린이날 선언문에서 방정환이 이야기한 ‘어린이를 윤리적 억압으로부터 해방하여 완전한 인격체로 예우하라’ 라고 했던 말은 지금 이 시대에 필요한 말이다.

김영미 (어린이책시민연대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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