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홍골(泓洞, 篊洞)

▲ 김배선 향토사학자

홍골은 국골과 함께 조계산의 송광사 측 대표적인 계곡이다. 홍골 입구의 다리를 지나면 건너편에 삼각형을 이루고 있는 계곡이 홍골 입구이다. 홍골의 한자는 『송광사고』에 ‘泓洞’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는 물이 많은 골짜기라는 뜻이다.

홍골의 모양은 송광사 굴목재(동)에서 서쪽으로 형성된 산세의 가운데 계곡의 중간지점에서 왼쪽을 향해 양대 계곡인 국골과 나란히 깊은 계곡을 이루고 있다. 홍골의 생김새는 깊고 깎아지른 듯 가파른 형태를 이루고 있다.

입구에서 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마지막 장박골 능선까지는 길이 험해 2시간 30분 이상이 소요되며, 마지막에 좌우로 나뉘는 골짜기의 왼쪽이 ‘피아골‘이라고 하는 계곡이다.

홍골은 ‘泓洞’이라는 이름처럼 비가 오면 대단히 많은 물이 쏟아져 내린다. 그것은 계곡이 100m 이상의 높이의 ‘V’자 모양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광사고』에서는 홍골의 이름을 ‘泓洞’(물 많은 골짜기)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홈이라는 의미의 홍동(篊洞)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홈 골’(홈 대골)이란 이름도 계곡의 모양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효령봉(연산봉)과 시루봉 중간의 장박골 말발굽 능선 시루봉 삼거리 좌우에 형성된 두 골짜기가 중간에 합쳐지며 다시 길게 뻗어 내린 골짜기의 모습이 골이 가파르고 깊어 흡사 홈 대 모양을 닮았다고 하여 ‘홈 대골’이라 부르던 것을 한자의 홈(홈통)을 홍(篊)자로 바꾸어 홍골로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송광사고』에 물이 깊다는 뜻의 ‘홍골’이나 인근에 전해오는 홈대(물을 대기 위하여 긴 통나무를 세로로 잘라 속을 파내거나 대나무를 반으로 쪼개 가운데 사이사이의 마디를 제거하여 물을 흐르게 만든 도구) 모양에서 왔다는 홍골 모두가 골짜기의 모양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나 그 어원을 모르는 많은 사람은 홍골의 홍을 붉을 홍(紅)으로 추정하여 골짜기의 붉은 단풍을 연상하지만 홍골은 단풍이 별로 많지 않고, 소나무가 많았던 골짜기였다. 홍골로 직접 들어가 보거나 송광사에서 운(인)구재를 지나 천자암으로 가는 봉우리에서 골짜기를 건너다 보면 홍(홈 대골)의 모습을 실감할 수 있다.
 

국골(窟嶝洞)

국골은 홍골과 더불어 조계산의 송광사 측 양대 계곡 중 하나이다.

국골은 송광사에서 선암사로 넘어가는 계곡 길(등산로)의 송광사로부터 약 1km 지점인 토다리삼거리에서 오른쪽은 굴목재로 가는 중간길(등산로)이고, 왼쪽은 연산사거리가 나오는 정상 방향에 있는 큰 계곡이다.

홍골과 한 능선을 경계로 나란히 동쪽 장박골 뒤편 줄기를 향하고 있는 국골이 대표적인 골짜기로 불리는 것은 골짜기의 크기 때문만은 아니다.

입지 조건이 조계산을 상징하는 골짜기인 장박골과 정상인 장군봉으로 가는 통로일 뿐 아니라 삶의 현장으로 나무꾼과 같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드나들던 골짜기였기 때문이다.
그 흔적의 하나로 국골의 중간지점까지의 등산길을 자세히 살펴보면 보통의 등산로와 달리 폭이 약간 넓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1959년 말부터 1960년대 초 사이에 조계산의 소나무를 벌채할 때 화물차가 드나들었던 길이었기 때문이다.

그토록 깊은 계곡에 차가 드나들 수 있었던 것은 계곡의 지형구조가 홍골보다는 비교적 길을 내기 쉬운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계곡의 이름에서도 추정해 볼 수 있다. 국골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자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송광사고』에는 굴등동(窟嶝洞)으로 기록되어 있다.

굴등은 토다리 삼거리에서 약 150m 지점의 왼쪽인 홍골과 경계를 이룬 능선의 이름으로 바위틈에 제법 큰 굴이 하나 있는데, 국골의 공비굴이라고 불려왔다. 그러나 ‘공비굴’은 1950년경 이후의 이름이고, 이미 오래 전부터 물이 나는 이 굴이 사람들에게 발견되어 골짜기의 상징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국골이라는 이름을 풀이해 보면 이 계곡의 비탈에 굴이 있어 그 능선을 굴등이라 하였고, 굴등이 있는 골짜기이므로 굴 등골이라 불렀으며, 이것을 송광사에서는 한자로 窟嶝洞(굴등동)이라 표기한 것이다.

국골은 이밖에도 송광사나 선암사에서 조계산 정상을 넘어 종주하는 등산길이 된 것처럼 조계산의 동서에 자리 잡고 있는 두 절과 각각을 상징하는 장군봉과 효령봉(연산봉) 그리고 그 가운데 위치한 장박골이라는 골짜기를 연결하는 통로가 되었다. 국골은 이미 사람들의 발길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입지조건을 갖고 있었고, 이로 인해 한국전쟁 전후(1948~1953) 산으로 들어간 빨치산들이 활동할 때는 국골이 그들의 주요한 이동 통로이자 활동 무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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