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8 - 박경창(72세)

조곡동 주민자치위원회는 2011년부터 지역의 정체성을 되찾고자 마을유래찾기 사업을 추진했다. 그 첫 사업으로 조곡동 철도관사를 주목하여 2012년 ‘우리마을 이야기 찾기- 조곡동 철도관사’라는 소중한 책자를 발간하였다.

▲ 박경창(72세) 조곡동 주민자치위원회 부위원장
주민자치위원회가 중심이 되어 지역 주민이 발굴해 낸 마을의 유래와 역사가 고스란히 담긴 소중한 결실이었다. 조곡동 주민자치위원회는 오늘도 지역의 소중한 자원과 마을의 모습을 되살려 지역을 활성화하기 위한 고민을 계속하고 있다.

박경창 씨(72세)는 조곡동 주민자치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아버님(작고)이 철도 퇴직자여서 누구보다도 철도관사마을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

철도 직원도 술먹으면 엉뚱한 집으로

박경창 씨는 1942년 여수 공화동 철도관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철도에서 근무했기 때문에 여수 철도관사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릴 때 기억에 의하면, 여수 공화동 철도관사는 10~15채 정도 있었고 관사 형태와 크기는 조곡동 철도관사랑 비슷했다고 한다.

1912년에 태어난 아버지는 해방 전 철도에 들어가서 차량 검수원을 하셨다고 한다. 순천으로 발령받은 아버지를 따라 1947년 조곡동 25호 철도관사로 오게 된다. 그때 나이 6세.

“여섯 살 때 조곡동 25호 관사로 와서 군대 가기 전까지 25호 관사에서 살았지. 순천으로 이사한 다음 해에 여순사건을 봤으니까, 1947년도에 25호 관사로 왔지. 25호 관사 옆에 철도구락부가 있었어. 그 안에서 연극도 하고. 그때 슬픈 영화가 들어왔어. 그거 보고 눈물 흘리고 그랬어. 영화도 틀어주고 연극도 하고 그랬어. 우리가 거기서 다 보고 그랬지. 구락부 앞에 야외 풀장도 있었고.”(아마도 목욕탕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박경창 씨는 열아홉인 1960년에 군대를 가서 직업군인으로 생활하다가 74년도에 제대를 한다. 군대 있을 때 25호 관사에서 22호 관사로 이사를 해서 결혼 후 77년부터 살고 있다.

“그때만 해도 매년 집에 와도 집들이 똑같으니깐 집을 잘 못 찾았어요. 지금이야 담벼락이 있는데 그때는 모두 사철나무 담이라 ‘요집일까 요집일까’ 하면서 집을 못 찾아가기도 했어요. 철도 직원들도 술먹고 집을 못 찾아가고 엉뚱한 집에 들어간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한달에 한번 매복 나가면 잠 못 자지, 모기 뜯기지, 그것이 제일 고통스러워

박경창 씨는 직업군인을 하려고 맘먹고 군생활을 하게 된다. 1969년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1970년 6월 25일 귀국한다. 생과 사를 넘나들던 월남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69년 4월 20일에 가서 70년도 6월 25일 귀국했어요. 죽은 사람도 많았지만 젊으니까 건강하게 돌아왔죠. 월남 가서 고생도 했고, 재미있었던 일도 있었고, 못 돌아온 동료 생각하면 안타깝죠. 월남 가서 특별하게 생각나는 것은, 월남에 모기, 거머리가 많잖아요. 작전 나가서 진지가 편안히 있을려면 그 근방에 매복을 나가야 돼. 베트콩 들어오기 전에 미리 탐지해서 격퇴하는 것이죠. 밤에 모기 물지 거머리 있지. 잠을 못 자고. 평균 한 달에 한 번씩은 매복을 나가야 해요. 그거 나가면 죽어브러. 잠 못 자지, 모기 뜯기지, 그것이 제일 고통스럽고. 작전 나가서는 죽을 수도 있죠. 운이 없으면 죽는 거에요. 운명이 다 되면 다 죽는 거고.”
 

철도운동장 꼬랑에서 미꾸라지도 반 바케스 잡았어요

철도관사마을의 상징인 철도운동장이 공사에 들어가서, 운동도 못하고 조곡동 주민자치위원회의 자랑인 ‘시민 자전거교실’도 못하니 이만저만 서운한 게 아니다. 어릴 적 철도운동장의 기억을 들어보았다.

“그때는 지금 실업축구팀 같이 순천 철도국에 축구부가 있었어요. 잘 찼어요. 우리 어렸을 때 국민학교 축구부가 많이 있어서 축구도 하고 야구도 많이 했어요. 아, 철도운동장 옆에 꼬랑이 있었어요. 조그마한 냇가라고 하죠. 큰길가 제외하고 삼면에 있었어요. 거기 꼬랑 가에다 토란 같은 거 채소 같은 거 심어서 해 먹고. 나 어렸을 때 형들이랑 와서 미꾸라지도 많이 잡았어요. 칸칸이 막아가꼬 막 퍼. 붕어도 이만씩한 거 많이 나오고. 미꾸라지도 반 바케스씩 잡았어요. 어렸을 때 일 년에 한 번씩 꼬랑에서 피라미, 붕어 새끼들 잡아가꼬 국 끓이고 그랬어요.”

철도운동장 삼면에 있던 꼬랑은 박경창 씨가 제대하고 나서 없어진 거 같다고 기억한다. 지금은 운영하지 않고 간판만 있는 서울약방은 그가 어렸을 때부터 있었다고 한다. 어르신들을 만날 때마다 옛날 철도운동장과 철도관사마을의 모습을 담은 사진자료가 없어 기억만으로 그릴 수밖에 없어 안타까움은 더해만 간다.
 

철도관사 몇 채는 꼭 복원해서 철도 역사를 보여주어야 해요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을 시작한지 5년이 되어가는 그는, 철도관사마을에 대해 누구보다도 애정과 관심이 많다. 올해 진행되는 철도문화마을만들기 사업에 대해 누구보다도 열심히 홍보하고 다니는 그가 내년에 진행되는 국비사업에 대해 바라는 것이 있다고 한다. “관사마을이 옛날 형태가 없거든요. 거의 다 변형되고 리모델링해서. 옛날 관사는 다다미방에 방 두 개, 화장실도 재래식으로 안에 있고 그랬는데, 지금은 다 개조가 돼서 완전히 변했잖아요. 그런 걸 새로 매입해서 몇 채를 옛날 관사같이 만들어야 해요. 철도 관사니까 철도 역사를 알 수 있는 뭘 하나를 지어야 해요. 여기다가 박물관 같은 거 있으면 좋겠어요. 그런 게 있어야지. 벽화 그리고 그런 것도 깨끗허니 좋지만, 그거 두 가지는 있어야 겠어요. 벽화는 시각적인 거고, 환경이지. 다른 데도 벽화는 많이 하잖아요. 여기 관사가 많이 크잖아요. 모형은 이렇게 있고. 다른 지역보다 훨씬 커요. 이렇게 크고 좋은 데는 없어요. 이런 걸 많이 부각했으면 좋겠어요.”

지금은 세상이 많이 변하고 각박해졌지만 예전 관사마을 사람들은 인심이 넘치고 정이 넘쳤다고 한다. 철도문화마을만들기 사업이 마을주민들과 마을을 다시 새로운 만남으로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주민자치위원회 활동으로, 정원박람회 자원봉사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경창 씨는 오늘도 동네 곳곳을, 시내 곳곳을, 자전거로 다니신다. 어릴 때 동네 아저씨의 자전거로 배운 자전거 실력은 베테랑이다.

끊임없이 페달을 밟아야 넘어지지 않고 제 길을 가는 자전거 바퀴처럼 작은 일이라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그의 모습에서 건강한 마을의 미래를 본다. 그 에너지가 마을 곳곳에 수놓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연재는 8회로 마무리합니다. 지면 관계상 못다 실린 이야기는 11월 초에 발간되는‘조곡동 철도관사마을 주민구술생애사’라는 책자에 실립니다. 그동안 보내주신 관심과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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