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심명선
어린이책시민연대 순천지회장

2000년대 초, MBC의 오락 프로그램 <느낌표! 책책책, 책을 읽읍시다!>이 ‘기적의도서관’이라는 어린이 전용도서관 건립을 추진했다. 이 프로그램은 국민의 독서열풍을 일으켰고, 방송에 소개되는 출판사의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등 독서 문화와 출판시장에 미친 영향력 등이 컸다. 그리고 우리 사회에 도서관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자극하였다.

도서관은 칸막이 쳐진 딱딱한 책상에 앉아 공부하던 곳을 그리던 때여서 ‘어린이도서관’이라는 이름조차 낯설던 시대였다. 그저 조용히 책을 읽어야 하는 침묵의 공간이었던 도서관은 이 프로그램을 통해, 신발을 벗고 들어가서 편안한 자세로 책을 볼 수 있고, 소파에서 뒹굴거나 소리 내어 책을 읽거나 읽어주는 곳으로 인식을 바꾸었다.

2003년, 국민의 관심 속에 전국 제1호 기적의도서관이 순천에 문을 열었다. 순천 기적의 도서관 개관 1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도서관 시설과 운영과 관련한 탐방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도서관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프로그램들도 다른 도서관으로 퍼져나갔다.
 

▲ 2017년 현재, 도서관은 더는 어둡고 조용한 공간만은 아니다.

현재 28만 명이 살고 있는 순천에는 8개의 공공도서관, 60여 개의 작은도서관이 있다. 민관 협력으로 이루어진 기적의도서관 설립 이후 순천시의 도서관 정책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고, 도서관 위치를 안내하는 지도에 붙은 ‘도서관이 있어 아름다운 순천’이라는 말은 순천시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그런 순천시에 2014년, 특별한 도서관이 또 문을 열었다. 이름하여 ‘순천 그림책 도서관’이다. 그동안 그림책은 도서관이나 특정 단체, 출판사가 운영하는 그림책 관련 프로그램 등에서나 만날 수 있었다. 최근 그림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어린이만 보던 책으로 인식되었던 그림책이 어린이는 물론 모든 연령층이 읽는 책으로 인식이 바뀌었다.

그동안 그림책은 어린이 문학의 한 갈래로서 어린이도서관 또는 도서관 어린이실의 한쪽을 차지하던 것에서 이제는 ‘글과 그림의 조화로운 예술’을 다양하고 폭넓게 향유할 수 있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고 있다. 그런 중에 순천시가 특정 분야의 책과 자료를 누구나 쉽게 공유하고 누릴 수 있도록 전문분야 공공도서관으로 그림책도서관을 열었다는 것 또한 놀랍다. 그래선지 유치원과 어린이집 등의 단체 손님이 줄을 잇고, 그림책 도서관을 둘러보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는 이들도 많다. ‘순천 그림책 도서관’ 개관 이후 다른 지역에서서 그림책 도서관 개관 소식이 들려오기도 한다.
 

▲ 순천 그림책도서관 전경

그림책을 읽으며 책읽기의 기쁨을 새롭게 경험하고 있는 나 역시 그림책 도서관 개관 소식을 접하고 마음이 들떴다. ‘도서관 도시’에 살고 있음을 은근히 자랑하며 친구와 함께 순천 그림책도서관을 처음 찾았던 날, 필자는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세상에 공공도서관이 유료다!”
전시, 체험, 공연을 위주로 하는 본관은 ‘체험, 교육 수강료’라는 이름으로 3000원을 내야 들어갈 수 있다. 단체 및 순천시민 할인, 노약자 및 사회적 배려 대상자는 무료, 거기에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로 지정해 순천시민에게 야간 무료 개방한다며 생색까지 낸다. 

더 기막힌 것은 본관 자료실이 있긴 하지만 그림책은 대출 불가! 책을 빌리려면 기존 어린이실이었던 별관에서만 가능하다. 일일이 헤아려보지는 못했지만 본관과 별관 자료실에 같은 책이 꽂혀 있는 것 같지도 않다. 자료를 수집, 정리, 보존, 축적하여 누구나 이용할 수 있도록 평등한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평생교육에 이바지하는 시설이어야 하는 공공도서관이 저렴한 입장료라 할지라도 접근을 제한하는 이런 행정을 하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도 도서관 도시를 자처하는 순천시의 아주 특별한 도서관이 그 특별함을 이렇게 보여주다니 어이가 없다.
 

▲ ‘순천 그림책도서관’별관 자료실

아이들과 ‘그림책 도서관’을 이용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아이들의 연령대와 비례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와 함께 ‘체험 학습’을 즐기며 한때를 보낼 수 있는 어린이를 동반하는 경우, “도서관이 유료? 그것도 시립도서관이 유료라니?”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따뜻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편안한 느낌의 공간에 개관 기념으로 진행했던 <에릭 칼 순천특별전>을 비롯한 그동안의 국내외 작가들의 원화 전시, 인형극 관람, 영화 상영, 그림책 사진관 등을 즐기고 나면 입장료가 아깝지 않다는 의견이 많다. 반면 체험에 참여할 수 없거나, 잠깐 책을 볼 뿐인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는 부적절하다며, 키즈 카페나 실내놀이터보다 비싸다는 판단을 하기도 한다. 또 ‘그림책 도서관’이라는 이름에 기대했던 것만큼 특별한 도서관이라고 하기에 책의 분량이 많은 것도 아니어서 돈을 내면서까지 찾아가기에는 아쉬움이 많다는 평도 있다.
 

▲ ‘순천 그림책도서관’별관 전시실

기획 전시를 여러 번 관람하거나 본관 자료실에 있는 그림책을 보기 위해 자주 찾아가고 싶지만, 매번 입장료를 내는 건 부담스럽다. 상황이 어찌됐든 공공도서관에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는 것에 뭔가 석연치 않은 마음이 있긴 하지만, 도서관에 왜 돈을 내고 들어가야 하는가를 따지기에 겨우 몇 천 원에 스스로 너무 쫀쫀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문제는 유료 상업시설과 달리 공공재로서 우리 사회의 문화환경 토대가 되어야 하는 도서관이 가진 사회구조적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전가하며 유지되고 있는 이 상황에 대한 냉철한 판단이 필요할 것 같다.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림책 도서관’ 본관 자료실에는 국내․외 그림책 뿐만 아니라, 영어 원서 그림책, 다문화 그림책, 팝업북, 빅북들이 있다. 일반 책에 비해 훼손 위험이 높고, 분실 관리가 더 어려울 수 있다. 또 수준 높은 국내외 그림책 작가들의 원화들을 기획 전시하고 매번 좋은 공연과 상영을 준비하기 위해 소요되는 비용 부담이 큰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이것 때문이라면 도서관 운영비 확보를 위해 얻을 수 있는 눈에 보이는 ‘득’보다 보이지 않는 ‘실’이 많을 수 있다.

10여 년 전, 순천에서 시작한 기적의 도서관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에게 도서관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불어넣었다. ‘아이 하나 키우는 데 온 동네가 필요하다'라는 아프리카 속담이 공감을 얻으며 도서관이 있는 동네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입소문을 만들었다. 도서관은 어쩌다 한번 특별하게 큰 맘 먹고 다녀오는 곳이 아니라, 자신의 필요에 따라 일상적으로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 있는 곳이라는 인식을 갖게 했다. 또 도서관은 사회복지의 출발로서 누구든지 넉넉하고 자유로운 문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이라는 생각을 갖게 했다.
 

▲ 스웨덴 웁살라대학 도서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열려 있는 문화공간, 휴식을 위한 공간, 필요로 하는 온갖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 정보센터, 새로운 세계에 도전하기 위해 자기 충전을 하는 공간이 바로 도서관이다.


누구나 양심에 따라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권리가 보장되어 있는 여러 나라에서는 다양한 길거리 공연과 전시가 자연스러울 뿐만 아니라 폄하되지 않는다. 한정된 공간에서 펼쳐지는 특별한 문화 예술 공연이라 할지라도 취향의 문제일 뿐 참여하는 사람들의 의식 수준으로 가늠하거나 평가하지 않는다. 문화 의식은 특별한 공연과 체험만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가 갖고 있는 수준과 상식으로 자연스럽게 체화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도서관’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체험료’ 또는 ‘관람료’라는 꼼수를 부리며 징수하는 도서관 입장료는 우리 삶의 질을 높이는 바탕인 도서관에 대한 생각과 문화에 대한 시민의식을 오히려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도서관 앞에서 지갑을 열어야 했던 순간의 당황스러움이 기억에서 떠나지 않는다.

지난 10여 년 동안 우리가 꿈꾸고 만들어왔던 ‘도서관이 있어 아름다운 도시’는 이제 문을 닫아야 할 수 있다. 인류의 축적된 문화유산을 간직하고 시민의 문화 의식을 뒷받침해 줄 도서관이 빈부에 따라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상점으로 전락하지 않도록 도서관에 대한 철학을 고민해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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