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 김배선 향토사학자

조계산 국사봉은 망수봉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송광사 터를 형성하고, 4대봉(효령봉, 시루봉, 조계봉, 국사봉) 중 하나이다.

국사봉의 위치는 송광사의 서북방인 불일암(옛 자정암) 뒤편이며, 456m 높이이다. 산세는 부드럽지만 결코 낮은 봉우리는 아니다. 송광사의 주봉인 효령봉에서 시루봉을 거쳐 내려오는 우측(백호) 줄기를 이어받아 조계봉과 짝을 이루어 사자목을 형성하고 있는 송광사의 중요한 맥을 차지하고 앉은 봉우리이다.

국사(망수)봉에 오르면 송광사의 산세와 주변의 아름다운 경관을 한 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사방을 둘러보면 절의 모습은 정면이 아닌 우측면이 엇비슷하게 보이지만 송광사 터를 형성하는 효령봉을 비롯한 시루봉과 조계봉까지 그 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뿐만 아니라 북동쪽으로는 오두재와 등계봉이 가깝고, 서쪽 멀리 모후산을 배경으로 굽이굽이 골짜기를 채우고 있는 주암호의 환상적인 풍광을 보노라면 눈이 멈출 자리를 찾느라 입이 열려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이다.

 

▲ 국사봉에서 바라본 시루봉

주지한 것처럼 국사봉은 망수봉으로도 불리는데, 이름에 깊은 역사가 담겨 있으므로 두 이름에 대한 유래를 알아보자.

국사봉(國師峰)

* 고도: 456m, 좌표: 35-00-35N 127-16-05E

우리나라 각 지방에는 국사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봉우리가 수도 없이 많다. 봉우리의 이름인 국사의 한자어는 ‘國師’이다.

국사에 대한 사전적 풀이는 ‘임금의 스승’이나 ‘통일신라~조선초기의 법계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 또는 ‘지덕이 높아 나라의 스승이 될 만한 중에게 조정에서 내리던 칭호’ 등이 있다.
‘국사’라는 단어를 다시 풀이하면 고려시대에 임금이 도와 덕, 학식이 높은 스님을 스승으로 모셔 학문과 국사를 지도받던 제도이다. 국사의 위상이 백성들에게는 거의 신격화 되어, 국사들의 행적이 있는 산마다 신비한 전설이 전해진다. 그래서 ‘국사봉’이라는 이름 붙이기를 앞 다투었으므로 수많은 봉우리에 국사봉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살펴보면 고려 때 송광사(사굴산)에서는 15명이라는 절대 다수의 국사가 배출되기도 했다.

이 때문에 송광사는 우리나라 불교 삼보사찰 중 ‘승보종찰’이 되어 16국사가 보 맥을 상징하는 절이 되었다.

이렇게 보면 송광사에는 하나가 아니라 모든 봉우리를 국사봉이라고 해도 모자랄 듯하다. 조계산 국사봉이 언제부터 국사봉으로 불렸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봉우리의 위치가 제7세 자정국사 탑이 있는 자정암(지금의 불일암)의 뒤편이므로 국사봉이 되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국사봉으로 이름 짓게 된 전부라면 국사봉 스스로가 품 줄임을 거부할 것이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자정암이 있는 큰 골짜기에는 1세 보조국사를 대표하는 본 암(보조암)을 비롯하여 2세 진각, 3세 청진 등 대부분 국사님들의 자취가 함께 자리 잡고 있을 뿐만 아니라 승보의 본산에서 한분의 국사만을 상징하기에는 너무 초라해지기 때문이다.

국사봉은 송광사가 배출한 16국사를 상징하는 봉우리이며, 전국의 모든 국사봉들 중 진정한 국사봉이라 할 수 있다.

망수봉(望守峰) 

 

 

망수봉은 국사봉의 또 다른 이름이다. 한자로는 望守峰이며 사람들의 일반적인 표현을 빌리면 ‘망을 보는 봉우리’라는 뜻이다. 망수봉의 망수 대상은 송광사를 찾는 궁궐 관련 고관의 행차가 그 대상이었다고 전해오고 있다.

궁궐 관련 행차란 왕실에서 받들어 모신 원당에 기원의 제를 올리기 위한 고관의 방문을 말한다. 당시 행차가 오는 방향은 순천에서 출발하여 쌍암(승평)과 접치를 지나 오두재(梧道峙)를 넘어 관재를 향했다. 따라서 행렬을 맞이하는데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준비와 예를 갖추어야 하는 송광사 스님들로서는 행렬의 도착시간에 맞춰야 했을 것이다. 당시에는 무전기나 핸드폰도 없던 시절인 만큼 산길로 오는 사람들의 도착시간을 미리 알기 위해 찾아낸 방법이 저 멀리서 행렬이 오는 길목이 잘 보이는 산봉우리를 택해 망보는 사람(스님)을 세우는 것이었다. 그곳이 바로 훗날 망수봉이 되는 국사봉 정상이었다. 망수와 관련된 두 고개 중 오두재는 망수봉에서 동북방으로 보이는 접치(순천방향)에서 넘어오는 사람들의 행렬이 한눈에 들어오는 고개로 도착시간을 미리 가늠할 수 있는 길목이었다. 관재는 감로암 뒤편에 있는 송광사로 넘어오는 고개로 큰스님들이 올라와서 마중하던 길목(곳)이다.

그런데 이 두 길목의 위치가 시간상으로 절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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