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주인공 김민우와 함께 인도 요가 스승들의 답을 들어 볼까요?
 

▲ 장용창

“네팔의 물 부족 문제가 이렇게 심각한데, 환경단체인 지구의벗 네팔 사무실에서 소변 한 번 눌 때마다 20리터의 수도물을 내려보내는 것을 나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 놈의 논리적 사고는 사람을 무척 괴롭게 한다고 김민우는 생각했다. 차들이 몇 킬로미터나 늘어서 있는, 어마어마하게 높은 고갯길을 넘자 카트만두의 아름다운 분지가 눈 앞에 펼쳐졌다. 카트만두는 예로부터 히말라야 산맥의 북쪽에 있는 티벳과 산 아래 남쪽에 있는 인도를 오고 가는 사람들이 머무르는 중요한 교통의 요충지였다.

히말라야의 산맥들이 카트만두에 끊임 없이 눈 녹은 물을 흘려주고는 있지만, 그렇다고 소변을 볼 때마다 한 바가지씩이나 흘려도 될 만큼 많은 양은 아니었다. 카트만두에 인구가 늘어나고 생활 방식이 서구화되자 지하수 수위가 급격히 떨어졌고, 서민들은 점점 더 깊은 우물을 파야 했다. 처리되지 않은 하수 때문에 지표수는 완전히 오염된 상태였다. 김민우는 지구의벗 한국 지부인 환경운동연합에서 몇년간 통번역 자원봉사를 했기 때문에, 지구의벗 네팔 지부에서도 그를 환영해주었다. 지구의벗 네팔이 그에게 부탁한 일은 네팔의 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술적 대안들을 인터넷에서 찾아서 정리하는 것이었다.

물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적 대안은 뻔했다. 물 사용량을 줄이고 하수 처리 시설을 늘리는 것이다. 그런데, 물을 아껴 써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보고서를 쓰면서 정작 환경단체 사무실에서 소변을 볼 때마다 20리터씩 물을 내려버리는 이 모순에 김민우는 답답했다. 그렇다고 환경단체 사람들이 나쁜 것도 아니었다. 도심지 빌딩에서 근무하면서 소변을 처리할 수 있는 다른 대안은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김민우는 주말에 버드 라이프 (Bird Life) 네팔 지부에서 주최한 철새 탐조 행사에 갔다. 네팔엔 칼새들이 제비처럼 건물 안에 집을 짓기도 하고, 해지는 저녁이면 솔개들이 수백 마리씩 상공을 날기도 했다. 숲으로 가니 한국에선 보기 힘든 바람까마귀가 바람을 타고 부드러운 원을 그리면서 날벌레를 잡는 모습도 보였고, 딱다구리를 닮은 바벳의 화려한 색도 볼 수 있었다. “아이고, 이제 좀 살 것 같다.” 김민우는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가 네팔의 환경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한 것은, 단지 그가 환경문제에 관심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그는 인도로 떠나오면서 세속적인 모든 관심을 끊고 수련에 전념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리시케시에서 요가 철학을 체계적으로 가르쳐준 달마난다 선생이 말하기를 25세에서 50세 사이인 사람들에게는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스승들, 신들, 조상들, 이웃 사람들에 대한 의무와 함께 자연을 돌보는 의무도 있다고 했다. 서양식 환경 보호 개념이 인도엔 삼천년 전부터 있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김민우는 이 말이 반가워서 네팔에 가면 환경단체를 위한 자원봉사도 하겠다고 마음 먹었다. 그런데, 환경문제에 대한 관심은 다시 한번 속세에서 그를 괴롭혔던 문제, <논리적으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없는 이 세상의 문제>를 떠올리게 한 것이다. 그런 문제들을 직면할 만큼 아직 수련이 충분히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달마난다 선생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서양 근대에서 발전한 철학과 과학이라는 것은 결국 인간에게 있는 생각이라는 작용을 너무나 과도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생각은 에고의 작용이다. 논리적 사고이다. 이 세상 문제들을 논리로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에고이다. 그러나, 우리를 해방시키는 것은 생각이나 에고가 아니다. 우리 안에 있는 신이 깨어날 때, 거기에서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나온다. 결국 에고가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신적 차원에서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통찰하게 되는 것이다. 그저 사랑스런 눈으로 이 세상을 보라.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힘써 하라. 그것이 카르마 요가의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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