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기·자·의·삶·의·현·장 - 시골 가위손 한 씨

▲ 한 씨의 손을 춤추게 하는 다양한 가위들. 모양도 다르고 쓰임도 다르다. 고객의 맞춤헤어를 위해 한 씨의 가위손이 된다.
“빵집 기술을 배울래, 이발 기술을 배울래?”

제법 잘 살았던 동네 친구가 집에서 3만원을 훔쳐(?) 그 친구와 함께 서울 완행열차를 타게 된다. 서울 ‘16소개소’, 아직도 기억에 있는 직업소개소는 18세 시골 아이들에게 우여곡절의 추억을 만들게 한다. 학업을 중단하고 서울로 줄행랑 한 이 용감무쌍한 시골 아이는 할아버지께 잡혀서 양자택일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렇게 시골 가위손 한 씨의 팔자가 시작된다.

“선배나 형들을 보면 공장도 없다보니 시내버스 차장이나 정비소, 정비업을 하더라구요. 근디 나는 이발하는 기술이 좋아 보이더라고. 이발소에서 나오는 사람들이 번드러지고 말쑥하게 하고 나오면 그것이 엄청 멋있어 보이는거여.”

▲ 이발사를 천직으로 여기며 살아온 한영주(59세)님. 먼 곳에서도 찾아와주는 단골 손님들께 늘 감사하다.
가위손이 되겠다고 다짐한 한 씨는 고향의 그리움을 견디지 못하고 귀향한다. 선배들의 도움으로 순천에서 유명한 이발소에 들어가 잡일부터 시작하며 열심히 기술을 익혔다. 좋은 이발사님들의 가르침과 한 씨의 팔자가 한 데 뭉쳐져서 다른 사람들보다 연습생 생활은 짧았다고 한다.

“이것이 내 천직이기는 한갑데. 봉사활동 갔다가 손금을 보는 할머니가 있어 보였더니 ‘자네는 쇠소리가 나는 일을 하면 수천 명을 거느리게 될 것이네’라는 말을 해. 그때 이 일이 내 팔자인갑다란 생각을 했제.”

천직으로 알고 손에서 가위를 놓지 않은지 40년이 되는 대흥이용원 한영주님(59세). 한 씨의 이용원은 상사초입에 있다. 더 깊은 곳의 시골이발소들이 다들 문을 닫게 되면서 한 씨를 찾아오는 단골 어르신들이 많다. 시내로 이사를 가도 여전히 버스를 타고 찾아온다. 이유는 하나였다. “이물없응께”

시골분들 스케줄(?)에 맞추다보니 이른 아침 5시 반이면 영업을 준비한다. 청소하고 화단에 물주고 일찍부터 찾아오는 손님들 머리를 만지다보면 식사를 제때에 하지 못할 때가 많다. 10시나 11시에 아침을 먹고 4시쯤에 점심을 먹게 되는 경우가 많아 그럴때만 조금 힘들다는 한 씨는 하루 종일 서서 일을 하지만 다리 아픈지 모르고 산다. 튼튼한 다리도 ‘긍께 이 일이 내 팔자인 것이제’ 한마디로 정리된다.

“지금은 봉사가 많아서 그런 일이 없는디 옛날에는 동네로 출장도 갔어. ‘언제 오씨요’라고 날을 잡아서 부르면 그날은 동네로 가서 마을사람들 머리 잘라주고 거동이 어려우신 분들은 집으로 가서 머리 해주고 그랬어.”

▲ 오랜 세월 자르고 염색하고 반복하다보니 손톱이 검게 염색되고 말았다. 그런 손이 부끄럽지 않고 자랑스럽다.
상상하니 정겹다. 햇살 따사로운 날 이장님의 방송소리가 마을에 울려퍼지면 덥수룩하게 머리가 자란 모습들로 삼삼오오 둘러모여 앉아 있을 모습. 한 씨의 가위질 소리가 잘그락 잘그락 전해질 때마다 햇살만큼 눈부시게 빛날 마을 사람들의 모습. 그런 세월과 함께 한 씨의 가위손은 단련되고 주름이 만들어져 갔을 것이다.

“내가 고생해서 번 돈으로 자식들 가르치고 필요한 돈 줄 수 있을 때 보람을 느끼제. 어쨌든간에 내 힘으로 일을 해서 자식들 챙길 수 있다는 것이 좋응께.”

현재 승주를 포함한 순천의 이용원은 170여개가 되고, 미용업은 5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발소를 찾았던 많은 남자 고객들이 미용실로 옮겨가고 있어서 이용원 종사자들의 한숨이 깊어가고 있다. 요즘 젊은 남자들, 남학생들도 대부분 미용실을 찾는다. 갈수록 이발소는 줄어들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시골이발소를 찾아오는‘단골’손님. 전용 헤어관리사 한 씨가 이물없어서 좋다.
시내로 이사를 가고도 꾸준히 찾아온다는 남정동 고객분(68세)은 이렇게 저렇게 주문도 조건도 없이 머리를 맡기셨다. 전용 헤어관리사 한 씨니까.

“옛날에는 집에서 이발을 했어. 동네 사람 중에서 그나마 이발할 줄 아는 사람이 동네 사람들 이발을 해줘.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을 움직여서 작동하는 ‘바리깡’으로 하는디 머리카락이 반은 뽑혀브러. 면허도 없이 그리하다가 이후에는 허가도 받고 했어. 면도도 숫돌에 칼을 갈아서 허고. 지금멩키로 염색하는 사람이 옛날에는 없었어. 근디 지금은 반 이상이 염색을 해. 긍께 요즘은 60이 넘어도 다 젊어 보여”

어려서 오빠 손을 잡고 이발소를 찾아가 머리를 자르고나면 요금 500원을 셈했다. 그러면 집까지 걸어가는 길에 과자 사먹으라고 50원을 거슬러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 시절 미용실도 몰랐거니와 특별히(?) 거슬러 받았던 50원의 행복이 참 귀했다.

요금 300원부터 시작했다는 한 씨의 가위손이 40년 일을 하는 동안 많은 어르신들, 형님들이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한 씨의 헤어관리를 받아왔던 고인분들은 지금 어느 분의 관리를 받고 계실까. 한 씨는 큰 욕심도 없고, 거대한 목표도 없다. 그저 당신 두 손으로 가위질을 할 수 있을 때까지 한결같이 찾아주는 손님들의 머리를 만져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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