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규 시인

위기가 깊어지면 스스로의 적막으로부터 오는 것이 있다고 했다. 깊은 어둠 속 고요의 파랑波浪을 부유하며 스스로 빛나는 그것. 존재의 근본과 삶의 근본을 알아채게 하는 그것.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 하지만 그것은 한 생을 살며 때가 되면 누구나 알아채는 것은 아니다. 단 한 번의 生을 사는 동안 그것을 한 번도 조우하지 못하고 가는 사람도 있고, 아예 그 자체를 모르고 가는 사람도 있다. 반면 그 기미를 느끼고 가는 사람도 있고, 그것을 확실하게 인지하는 사람도 있으며 그것으로 사는 사람도 있다.

그것은 늘 우리 안에 있으나 대부분 절체절명의 위기나 내면의 간절한 요구가 있을 때 만나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외부의 적막으로부터 오고, 내면의 고요로부터 온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적막을 두려워하고, 고요는 싫어한다. 그러니 외로움을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하고, 침묵은 견디지 못한다. 이것은 영장류인 인류가 과학의 발달과 함께 자본의 세월을 맞아 ‘돈’을 좇아 탐욕을 키워오며 그 영성靈性을 꾸준히 잃어왔기 때문이다. 작금에 이르러서는 그 내면의 신성神性을 믿지도 못할 뿐 아니라 아예 그 존재 자체를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우리 하나하나 그 스스로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고 선한 존재인지를 까마득히 잊고 사는 것이다. 
  
지금 이 문명이 가진 위기는 끝없는 직선의 성장주의적 사고와 그 현실로부터 온다. 진정한 진보는 직선의 곡선궤도를 찾아내고 그 순환의 궤도로부터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지만 겨울이 가면 다시 봄이 오는 것처럼 지속가능한 성장궤도의 순환시스템을 갖춰야만 지금 이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극복 과정에는 반드시 영장류의 특장인 영성靈性의 회복이 필요하다. 이것이 ‘의식’의 확장이고 그래야만 지금껏 인류가 찾아낸 소중한 가치들을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현실세계로 가져올 수 있다. 이 영성의 회복과 의식의 확장이 함께 하지 않으면 진정한 우리 삶의 질이나 사회의 변혁은 어려울 것이다. 그저 하나의 새로운 제도를 개혁하거나 일회적인 변화에 그치게 될 것이다.
        
존재의 모든 것, 삶의 모든 것은 물처럼 흘러들어와 물처럼 흘러나갈 뿐이다. 가만히 있어도 가고 몸부림을 쳐도 똑같이 간다. 그래서 존재와 삶을 그저 방치하자는 말은 아니고 그러니까 존재의 주체를 바로 세우는 것이 비로소 ‘나’를 사는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 ‘참나’를 사는 일이 영성의 회복이고 ‘의식’의 확장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우리의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우리는 늘 눈앞에서 무언가를 이루거나 얻어야만 성공이고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한다. 우선 이런 사고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영성회복의 시작이다. 수백 년 동안 이런 우리의 의식을 길들여온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와 가치의식을 벗어나는 것부터가 시작인 것이다.
    
사람들은 위기를 느끼면 잠잠해진다. 그것은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고요를 찾는 것이고 내 안의 신성을 가져오기 위한 본능적인 행위라고 말하고 싶다. 스스로를 깊은 고요에 두면 그 어둠 속 고요의 파랑波浪을 부유하며 스스로 빛나는 그것이 온다. 그대가 그것이다.

* 올더스 헉슬리의 『영원의 철학』에서 빌려온 말임.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