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계수 발행인

새해 들어 첫 광화문 촛불집회가 끝나갈 무렵 정원스님이 분신했다. 현장에는 “일체 민중들이 행복한 그 날까지 나의 발원은 끝이 없사오며 세세생생 보살도를 떠나지 않게 하옵소서. 박근혜는 내란 사범, 한·일 협정 매국질 즉각 손 떼고 물러나라”라는 내용의 유서가 발견됐다. 또 한 명의 의인이 민주주의의 제단 위에 자신의 목숨을 온전히 올려놓았다.

스님은 1977년에 출가하여 1980년 신군부가 저지른 불교 법란에 저항하는 불교탄압공동대책위원회의 일원으로 사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2007년 12월에는 4대강 사업을 대선 공약으로 내건 이명박 후보에게 계란을 던져서 징역 2년(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세월호 참사 당시에는 팽목항에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하며 생존자 구조와 진상규명을 위해 기도했으나 구조 작업에 아무런 성과가 없는 데 낙담하고 2년간 베트남으로 건너가 탁발을 하며 지냈다. 2016년 1월에는 한일 위안부 협상에 항거하여 외무부 청사에 화염병을 투척한 일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3개월 간 수감되기도 했다. 스님은 세월호 사건 이후 항상 노란 리본을 달고 다녔으며, 박근혜-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시위 활동을 꾸준히 해왔다고 한다.

나는 티비를 통해 전해지는 속보를 보고는 정의감에 불타는 한 시민이 집회 분위기에 흥분한 상태에서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이겠거니 하고 짐작했다. 민주화 운동의 역사에서 수없이 등장했던 열사들의 명단에 한 사람이 더해지게 되겠구나 싶은, 조금은 미지근한 기분으로 사건을 받아들였다. 아주 충격적인 느낌은 아니었던 것이다. 14일 스님의 발인식이 치러지고 지금까지 우리 사회에서 이 사건이 불러온 반향과 관심 또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극적인 장면에서조차 속절없이 눈물을 찔끔거리던 내가 왜 이렇게 된 것일까. 화상 환자는 조그만 움직임에도 피부가 찢기기 때문에 고통이 극심하다는데, 한 생명이 수천 도의 열기 속에 전신을 불사른 사건 앞에서 나를 포함해 우리 사회는 어떻게 이처럼 차가움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아마도 사상 초유의 국정 농단 사건과 대통령 탄핵이라는 상황에 국민들의 관심이 집중된 데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굴곡 많은 우리 현대사에서 전태일 분신 이후로 충격적인 사건들이 끊임없이 반복되어 온 현실, 곧 충격의 일상화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두말 할 것도 없이 세월호 참사가 있고 가까이는 국가 공권력에 의한 백남기 농민의 죽음이 있다. 참사 당시에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서서히 가라앉았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나도 남몰래 눈물을 흘렸었다. 어느 누가 그러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거대한 충격이 남긴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이어지는 작은(매우 잘못된 표현이지만) 충격들 앞에서 타인의 고통과 슬픔에 공감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은 무너져버린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진실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자들이 의도한 것이 아닐까.

일상화되고 있는 것은 충격만이 아니다. 거짓과 뻔뻔함이 일상화되고, 인간다움의 최소한의 근거라 할 수 있는 존엄성에 대한 비열한 공격도 일상화되고 있다.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해 ‘시체팔이’라 비난한 것은 그 말을 듣게 된 자신을 오히려 혐오하게 한다. 그리하여 진저리나는 현실로부터 우리의 관심을 떼어낸다. 공감은 연대로 나아가기 위한 토대이고 전제조건일 터인즉 국민들로 하여금 공감의 능력을 무너뜨리고 감성을 황폐하게 하는 것이야말로 저들이 헌법을 유린한 것보다 더 무서운 범죄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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