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 김배선 향토사학자

* 고도: 542m  * 좌표: 34-59-04N  127-20-05E
병정봉은 선암사의 남쪽에 있는 대승암(남암) 뒤쪽의 봉우리 이름이다.

선암사(터)의 남동쪽을 감싸고 있는 줄기에서 궐문을 향해 내 백호를 형성하는 기점에 솟은 병정봉의 위치를 정상에서부터 줄기를 따라 살펴보면, 장군봉→ 선암(배바위)→ 굴목재→ 굴목재 몬당→ 깃대봉→ 남암재→ 병정봉에 이르러 힘차게 솟구쳐 주변의 형세를 제압한다.

작은 품안에 대승암을 앉히고 나서 승선교를 향해 궐문을 형성하는 백호의 머리를 내미는 형상이다.

선암사의 입구 주차장에서 바라보는 상가 뒤편의 병정봉은 날카로움과 근육질의 산세에서 품어내는 힘을 누구라도 한 번에 느낄 수 있다.
 

▲ 선암사 주차장에서 바라본 병정봉

선암사와 주변마을에서는 병정봉이 풍수상으로 선암사 터에 커다란 영향을 행사한 경외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그 근거는 선암사에 내려오는 방화에 대한 비방(秘方)과 장군(봉)과 짝을 이룬 병정이라는 명칭을 통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먼저 선암사에서 병정봉에다 실시하였다는 방화를 염원하는 비방에 관한 이야기이다.
선암사에는 역대로 수많은 크고 작은 화재가 발생하였으니 그에 대한 근본 원인이 불(火)의 기운이 강하고, 물(水)의 기운이 약한 산세에 있다고 생각했다. 특히 강한 불기운을 뿜어내는 혈 점인 남방의 병정봉 때문이라고 믿었다.

풍수에서 남방은 불을 상징하므로 반대편인 북방은 물에 해당한다. 선암사의 정 남쪽인 병정봉이 불(火)의 기운을 품고 있는 봉우리가 되는 셈이다. 여기서 병정봉과 마주보는 북쪽인 운수암(북암) 뒤편의 산세와 비교해 보면 누가 보아도 병정봉(남) 쪽이 강함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확연한 차이가 난다. 백승청허, 즉 백호의 승함과 청룡의 허함이 남화와 북수의 산강수약으로 어울려 선암사의 풍수지리적 화재 원인을 뒷받침한 것이다.

그래서 이 같은 화액에서 벗어나고자 선암사의 이름을 물과 관련된 글자인 해천사(海川寺)로 바꾸기도 하였고, 건물에는 수없이 많은 海, 水라는 글자를 새겨, 기원과 비방을 행한 흔적이 남아 있다. 그중에도 병정봉에 행하였다고 전하는 비방으로는 봉우리의 꼭대기에 독을 묻고 바닷물을 채워 화기를 억눌러 화재가 발생하지 않기를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1970년대까지도 깨진 독의 조각이 있었다는 증언이 있다.

‘병정봉’의 의미도 살펴보자. 병정봉의 한자어는 ‘병정봉(丙丁峰)’이다. 선암사와 주변 마을에 살고 있는 일부 사람들은 ‘병정’의 뜻을 “병역에 복무하는 장정”이라는 ‘兵丁’으로 이해하고, 또 부르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장군봉의 부하 병졸봉이라는 뜻이다. 한자가 서로 다른 지명의 상관관계를 기정사실로 여기는 데는 이유가 있다.

조계산 선암사 측 산세의 주요 지명은 군사적 용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 장군봉, 장막동(골), 장수봉, 깃대봉 등이 그것이다. 이는 선암사 터를 형성하고 있는 산세가 장군대좌형이라 하여 주봉의 이름을 장군봉이라고 붙인데서 비롯된다. 봉우리나 골짜기의 이름이 장군을 보좌하는 부하장수이거나 군영에 해당하는 이름이 많다. 그러므로 丙丁봉을 兵丁봉으로 부르는 게 자연스럽다.

하지만 丙丁과 兵丁의 뜻은 분명히 다르므로 한 봉우리의 이름에 공존하는 각각 다른 의미와 관계를 살펴보자.

먼저 ‘兵丁’에 관해서는 앞서 장군봉과의 관계를 설명하였으므로 생략한다. 다음은 봉우리의 실제이름인 ‘丙丁’의 丙은 육십갑자의 윗(앞) 단위를 구성하는 십간(十干) 중의 세 번째 병방(丙方)이라고 하는 ‘24방위’ 중 하나이다. 정남에서 동으로 15° 이내의 구역이며, 밝음(불) 강건함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丁’은 십간 중의 네 번째 정방이며, 정남에서 서쪽방향으로 15°이내 구역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뜻과 봉우리의 위치를 비교해 볼 때 선암사에서 남쪽 봉우리에 붙인 ‘丙丁’이라는 이름은 의문을 제기할 여지가 없다. 결국 병정봉은 선암사의 남쪽 봉우리라는 뜻이다.

다만 ‘丙丁’을 ‘兵丁’으로 이해하게 되는 과정에는 선암사에서 장군(봉)대좌로 형성된 절터의 산세를 풍수상으로 자랑스럽게 여겨왔으나 오랜 세월 동안 병정봉의 이름을 우리말로만 부르는 과정에서 본뜻이 전달되지 못해 달리 인식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兵丁’을 강조하는 사람들을 보면 봉우리의 이름을 가장 먼저 ‘丙丁’이라 지었던 스님의 마음 속에도 이미 兵丁의 뜻이 함께 담겨 있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다.

兵丁과 丙丁에 관계없이 병정봉은 선암사의 남쪽을 주관하는 기운찬 봉우리임에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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