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관사마을에서 만난 사람들 7 - 임동락(80세)

철도관사마을에 41년 동안 살면서 마을 곳곳을 지날 때마다 그냥 허투루 지나치지 않고 꼼꼼히 살펴보는 이가 있다. 철도퇴직자인 임동락(80세)씨이다. “어디 앞에 가면 쓰레기가 많이 쌓여있다. 저 건물에 튀어나오게 공사한 것은 불법이다. 도로는 이렇게 나야 한다. 철도문화마을만들기는 이런 문제도 해결해야 한다.” 만나 뵐 때마다 그동안 고민했던 문제를 하나둘 꺼내놓았다.

철도청에서 관리직으로 근무하면서 상황을 점검하고,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는 등의 습관이 몸에 밴 듯하다.

긍께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어요

강천사가 있는 전북 순창군 팔덕면이 고향인 임동락씨는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시골에서 괜찮게 살았던 편이라 교육열이 강했던 아버지는 9남매 모두 고등교육까지 시켰다고 한다. 임동락씨도 순창농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조선대학교 법정대를 다녔다. 제대 후 31세라는 늦은 나이에 철도에 들어왔다.

 
“국가공무원 4급 일반행정직 100명 모집한다고 광고가 나서 광주농고에서 시험을 봤어요. 그때 우리가 5기가 될 거여. 그거 붙드라고. 1차 발령을 병무청 받고, 병무청을 집에서 못 가게 해서 안 갔어요. 안 가니까 2차가 내무부, 지금 행정자치부. 가니까 자리가 없어요. 3차 발령이 철도요. 3차도 안가면 끝납니다. 그때부터 철도에 들어온 거지. 65년도에. 긍께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왔어요.”

창고가 그대로 있다고 감탄하더래요

1970년대, 현재의 임동락씨 집에서 일제시대에 살았던 일본 사람들이 찾아왔다고 한다.

“나 출장가고 없을 때 여기 살던 일본사람이 왔대요. 우리 집을 가보자 해서 통역가가 안내해서 왔는데 집이 대부분 개조가 됐거든. 근데 창고가 그대로 남아 있다고 감탄하더래요. 지금 성동초등학교, 그때는 동국민학교. 그 학교가 왜정 때 일본 아이들이 다니던 학교인데, 그 학교 가면 왜정 때 교장선생님 사진이 있는가 봐. 와서는 이 길로 다녔고, 그때 교장 선생님 사진 있다고 그런 말 하드래요.”

▲ 일제시대 모습을 간직한 창고
집을 개조하면서 땅을 팠는데 해방 후 일본사람들이 묻고 간 일본칼(니뽄도)이 나왔다고 한다.

 중학교 때, 실탄 박스 메고 포탄 메고 따라 다녔어요

임동락씨는 2년 전 국가유공자가 되었다. 철도 직원 유공자 신청 서류는 많이 만들어 주었으면서도 정작 본인이 유공자인 줄은 모르고 수십 년을 보냈다고 한다. 어떤 사연이 있었을까?

“중학교 때, 6·25 직후 인민군 정규군이 이북으로 미처 못간 잔류병도 있고, 빨치산도 있고. 그 사람들이 강천산, 회문산에 있었잖아요. 그거 소탕시킬라고. 군인들이 주둔하고 학생들이 총 들고 포탄 메고 따라 가는 거요. 전쟁 직후부터 53년 정도까지 회문산을 중심으로 순창 일부, 임실 일부, 김제, 정주 일부에서 빨치산들이 있었어요. 실제로는 빨치산 잡으려고 군인 따라다니면서 전투를 했는디, 나는 해당이 안 되는 줄 알았어요.”

그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이야기하신다.

“군인들 총을 우리한테 메게 하고, 실탄 박스를 메고 가든지. 60미리 박격 포탄을 메고 따라갔어요. 한번 갈 때 15명에서 한 30여 명이 가고. 산에서 자고 심부름해주고, 겨울에 가니까 짚다발 가져오라면 갖다 주고. 호 파놓은 데 깔고, 호 속 진지에 저녁에 실탄이 날라오고, 전투도 하고. 회문산 전투에서 총 메고 선발대 간 사람은 많이 죽었어요. 학생들도 죽고, 군인들도 죽고. 빨치산이 점령한 부락이니까 밥도 해주고 빨래도 해주고 그랬을 거 아니에요. 그 부락에 가서 불 지르면 소도 튀어나오고 돼지도 튀어나오고. 지금도 기억이 나요. 삶이 무엇인지 갓난 어린애를 솜에 싸안고 따라 나오는 등 그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습니까? 전쟁이란 이렇게 비참해요.”

유공자 신청은 고향에 조부님 제사를 모시러 갔다가 하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중학생으로 토벌 같이 했던 동네 사람들은 다 유공자가 되어서 당연히 임동락씨도 유공자가 된 줄 알았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국가유공자가 된 지 2년이 되었다.

일은 혼자보다 몇 사람이 머리 맞대야

관사마을에 41년 살면서 관사마을이 어떻게 변했으면 하는지 물어보았다. 동네 곳곳을 그냥 허투루 지나는 성격이 아닌지라 여러 가지 건의사항을 이야기한다. 젊은 시절 공부했던 경제학, 법학 지식과 철도 관리직으로 근무하면서 몸에 밴 의식으로 요목조목 따끔하게 지적할 것들이 많다.

“관사마을 전체에 도시가스가 들어와야 해요. 같은 세금 내는데 똑같이 해줘야지. 노동조합 쪽까지는 들어오고 건너편 쪽에는 안 들어와요. 똑같이 혜택을 봐야지. 같은 조곡동인데 이렇게 행정을 하면 쓰겠어요.

새마을사업으로 포장을 했는데 선거 때만 해 줍니다. 선심 쓰느라고. 도로포장을 하는데 위치적으로 봐서 도로를 이용하는 효율성을 따져 봤을 때, 위에 도로보다는 밑에 도로가 이용 빈도가 높아요. 포장은 아래부터 해서 올라가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혜택을 다 보잖아요. 근디 위에서부터 한다는 말이야. 건설과에 지적을 했어요. 철도 그만두고 시 건설분과 민간자치위원회 참여를 하게 됐어요. 민간이 참여해서 예산 심의를 하는데 지역 시의원 중에 입김 센 사람이 하는 대로 될 거 아니에요.

순천지역에 비가 오고 태풍이 오고 그러면 제일 위험한 지역을 1순위로 공사 착수를 해야 옳잖아요. 근데 그렇게 안하고 순천시청에서는 동별로 균등하게 나누어 줍니다. 조금씩 조금씩. 그러니 뭔 효과가 있어요.”

이야기 도중에 평소에 생활신조와 같은 말을 자연스럽게 건네신다.

“비가 오면 빗방울이 나무에 부딪치고, 바우에 부딪치고 하면서 강으로 가고, 강에서 바다로 흘러가고, 그러잖아요. 바다가 안 썩는 것은 몇 프로 안 되는 염분 땜에 안 썩는 거예요. 사람도 그 몇 %가 사회를 살리듯이 우리는 그걸 믿고 사는 거죠.”

퇴직하고 나서 모 신문사 지국도 하고, 아파트 관리사무소 소장 일도 했다고 한다. 몇 년 전에는 조곡동 주민자치위원회 고문 역할도 하고,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진행하는 바둑교실 선생님 역할을 하기도 했다.

퇴직 후 여러 가지 일들을 하면서 ‘일은 혼자 하는 것보다 몇 사람이 머리를 맞대면 훨씬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오늘도 임동락 씨는 마을 이곳저곳을 분주히 다니며 이런저런 문제들을 끊임없이 사람들에게 이야기한다. 그 바쁜 발걸음이 마을을 변화시키는 몇 %의 소금이라고 믿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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