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의 신도심에는 아침마다 새로운 건물이 생긴다. 따닥따닥 붙어 있는 칸막이 사이로 카페, 식당, 병원, 학원, 미용실... 매일매일 새로운 공간이 자리 잡는다. 나는 더디게 가고 싶지만 세상은 기다려 주지 않는다.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기가 여간 버겁다.

연향동 대석초등학교 정문 앞에 가면 나만큼 느리고 변화 없는 곳이 하나 있다. 그곳에 가면 20년째 초석처럼 자리 잡고 있는 노벨문구사가 있고 사장님 내외가 있다.

▲ 연향동 대석초등학교 정문 앞에 학교가 문을 열 때부터 지금까지 20년 간 자리를 지켜온 노벨문구사

근처에 크고 작은 문구점이 서너 번 생겼다가 사라지는 동안 꿋꿋하게 그 자리를 지켜왔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노벨문구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했다. 별다른 화려함이나 현란한 상술은 없지만 안 사장님의 주름진 미소를 보면 그저 편안해 지는 것이 손님들도 같은 마음이 아닐까?

▶ 문구점은 언제부터 시작했나요?

원래 남편은 용접 기사였는데, 작업 중에 사고를 당해서 팔이 불편해졌어요. 나도 신혼 때는 다른 일을 했는데, 남편의 사고 이후 우리가 같이 할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이 일을 시작하게 된 것이죠. 여기 대석초등학교 개교할 때 이 가게를 시작했으니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네요.

▲ 인심 좋은 사장님 내외. 안 사장님은 부끄럽다며 수줍어하는 게 소녀 같다.

▶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서 문구점을 하고 있는 게 지루하지는 않아요?

아이고 지루하죠. 우리도 신도심으로 옮겨볼까 고민한 적도 있어요. 하지만 예전에 남편 사고 나던 때를 생각해보면 욕심이 사라져요. 신혼 때 당한 사고라서 그때는 남편하고 같이 생활만 할 수 있다면 더 이상은 바라지 말자하고 다짐했거든요. 욕심내지 않으면 지금도 살 만해요. 더 피곤해지지 않아도 되죠.

▶ 순천에는 신도심이 계속 생겨나고 있는데, 매출은 어때요?

젊은 세대들이 이사를 나가니 아이들이 줄기도 했지만, 매출이 줄어 든 이유는 다른 데 있어요. 대형마트가 많아진 때문이기도 하지만, 요즘엔 대부분의 학습준비물을 학교에서 직접 준비하죠. 그래서 아침에 준비물 사는 아이들로 붐비던 시절은 옛말이 되었어요.

▶ 그럼, 하루 중 가장 바쁜 시간은 언제죠?

아이들이 하교 하는 오후 2~3시가 제일 바쁘죠. 문구보다는  500원부터 1000원 사이의 군것질거리와 장난감이 더 잘 팔리죠. 손에 가득 담아도 2000원이 안 되는 저렴한 것들이지만 아이들도 하교 후에 참새 방앗간처럼 들리는 재미가 있나 봐요. 가끔은 2000원 하는 커플링을 사는 아이들도 있는데, 참 귀엽죠.
 

▲ 무엇이 그렇게 신날까? 아이들의 수다가 끊이질 않는다. 정말 이곳은 참새 방앗간이 분명하다.
▲ 나도 작은 스티커를 사보았다. 1000원 짜리 커플링을 살걸 그랬나?

▶ 다른 일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나요?

가끔 하죠. 코흘리개들한테 작은 푼돈을 하루 종일 받다보면 작은 품일이 많아요. 온종일 종종거리며 아이들 쫓아다니는 것이 힘들죠.

예전과 달리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고 거친 말을 함부로 하는 아이들이 더러 있기도 하고 그런 아이들 뒤엔 꼭 그런 엄마들이 있지요. 아침에 급하다고 준비물을 외상 하고선 소식 없는 아이들도 있고, 우리 아이는 그런 짓 하지 않는다며 잡아떼는 엄마들도 있어요. 그럴 때마다 진이 빠지게 하지만 어쩌겠어요? 동네 장사인데 나이든 내가 참아야죠.

제 딸이 작년에 결혼해서 나도 곧 할머니가 될 거에요. 이제는 이 아이들이 내 손주구나 생각하면 맘이 편해지고 그러네요. 그래도 이곳에서 우리 가족이 생계를 유지했으니 고마운 곳이죠. 이제 뭐 다른데 특별히 돈 들어갈 일도 없으니 이 일을 계속해야죠.

노벨문구점 사장님 내외는 세월만큼 쌓아둔 이야기가 많지만 그저 웃으면서 아이들이 예쁘지 않으면 이 일을 어찌 하겠냐며 또 웃는다.

예전에 우리 집 아이는 클 때 발음이 더뎌서 엄마도 알아듣기 힘든 어눌한 말투를 썼다. 퇴근이 늦어지는 날은 아이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보냈는지 미안한 마음에 “오늘은 뭐하고 놀았니?” 하고 물으면 아이는 곧잘 “문광구랑 놀았어”라고 대답했다. 나는 으레 광구라는 친구랑 놀았나보다 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문광구는 사람이 아니라 문구완구를 말한 것이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아이는 노벨문구에서 채웠던 것이다. 지금은 청년이 된 아이가 우연히 초등학교 앞에 들렸다가 여전히 그 자리에 있는 그 곳이 반가웠던지 사장님께 인사를 하고 왔다고 한다. 내 아이뿐 아니라 대석초등학교를 졸업한 많은 아이들에게 이 곳은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담고 있을 것이다.

동네문구점 사업은 이미 10여 년 전부터 대형마트와 프랜차이즈점으로 바뀌면서 하락세를 걷고 있다. 주변에 있던 문구점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한다. 사람은 늙고, 건물을 낡게 하고, 있었던 존재를 사라지게 한다. 도시는 그 안에서 존재와 소멸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 급격한 변화 속에서도 묵묵히 자리를 지켜낸 것들이 있는데, 그 자리지킴의 가치는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곳이 화려한 고궁이나 사찰일수도 있겠지만 동네 한 켠에서 우리와 시절을 함께해 온 노벨문구도 누구에게는 추억의 장소이며 명소일 것이다.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 나오는 초원사진관처럼 노벨문구도 나중에 순천에 가면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될 수 있게 사장님 부부가 오래오래 지켜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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