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닭과 달걀, 그리고 사람들 ⑭

▲ 김계수
달나무 농장
닭을 키워 온 지난 10여 년 동안 1년에 100여 마리씩, 모두 1000마리가 넘는 닭들이 내 손에 죽었다. 이만하면 닭 백정이라 불린다 해도 할 말이 없다. 봄가을로 한 번씩 부화장에서 병아리를 받을 때 100마리 단위로 거래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암탉 칸에 30여 마리씩 넣어주고 남은 수탉들을 잡는 것이다. 우리 닭이 맛있다는 말이 조금씩 퍼지면서 한여름 복달임으로 먹을 백숙용이나 옻닭용으로, 그리고 설날 떡국에 넣을 용도로 사람들이 곧잘 찾는다. 산란계 암탉은 체격도 작거니와 내 농사 밑천이기 때문에 잡아본 일이 없다.

닭을 해체하는 일은 동네 개구쟁이들의 재미난 구경거리이다. 나도 어렸을 적에 그랬다. 우선 닭의 식도는 신축성이 뛰어난 조직으로 되어 있어 일단 입으로 들어온 먹이는 어떤 크기도 삼킬 수 있을 정도다.

닭은 이가 없어 먹이를 씹지 않고 삼키기 때문에 식도의 신축성은 포유류보다 더 좋아야 할 듯하다. 심장은 2심방 1심실이어서 중고등학교 국사책에 나오는 빗살무늬토기를 닮은 홀쭉한 항아리 모양이다.

닭의 경우 특히 모래주머니는 모양이나 크기가 같은 닭이 하나도 없다. 내장형인 불알도 크기가 제각각이다. 닭들이 신참자를 금방 알아채는 것을 보면 나로서는 도저히 구분할 수 없는 외모의 특징으로 저희들끼리는 서로를 구분하는 것 같다.

겨울이나 이른 봄에 잡은 닭은 기름이 많고, 여름과 가을에는 기름이 적다. 그것은 닭들이 가을 이후 추위를 견디기 위해 몸에 기름을 채우고 기온이 오르는 봄에 기름을 비우기 때문이다. 어린 닭은 속살이 희고 맛도 담백하지만 깊은 맛은 없다.  시중에 나오는 닭은 속성으로 키운 육계라 대부분 살이 희고 육질이 치밀하지 않아 부드럽기는 하지만 쫄깃한 맛은 느낄 수 없다. 상업적인 축산은 닭 맛이 깊어질 때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게 닭고기의 붉은 색은 뜻밖의 것이 되고 비정상이 일상화·보편화되어 정상의 자리를 꿰찬다.

몇 년 전에 아내가 그 해 신수를 보기 위해 용하다는 사람을 찾아가 나를 집어넣었다고 한다. 그러자 내 손에 죽은 닭들의 영 같은 것이 보인다고 앞으로는 닭을 잡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미 부지기수로 잡은 닭의 생명을 되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 업보를 받아야 된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 업보로 인해 나에게 재앙이 내린다면 조금 억울할 것 같다. 죽은 닭의 절대다수는 내 입을 위해서 잡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입이 원했던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생명체가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생명체에서 나오는 유기물을 흡수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이 물고기나 짐승의 살이든, 식물의 열매나 잎, 또는 뿌리든 다른 생명체의 일부 또는 전부를 먹는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알곡이나 채소를 먹는 일은 자연스럽게 여기면서 먹잇감으로 동물을 죽이는 것은 혐오하고 기피할까. 동물은 식물과 달리 죽으면서 끔찍한 피를 흘리고, 고통스런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인가. 인간은 식물보다는 동물에게서 상대적으로 더 동류의식을 느끼는 것인가.

세상은 생명의 연쇄 고리이다. 남의 생명을 먹고 내 생명을 또 남에게 내어주는 과정, 즉 먹고 먹이는(먹히는 것이 아니다) 과정의 끝없는 연속이다. 그중에서 사람은 육신이 죽어 새나 곤충, 또는 풀이나 나무에게 보시하는 것만이 아니라 살아가는 과정에서 또다른 생명의 기운을 북돋는 일로 다른 생명을 취한 값을 치를 수 있다. 취미가 아니라 생명 유지에 꼭 필요한 일로 다른 생명을 취하는 것은 혐오나 기피의 대상이 아니지 않을까. 그러한 혐오나 기피는 오히려 생명들 사이에서 끝없이 일어나는 먹고 먹이는 순환, 또는 먹이 연쇄에 대한 부정이거나 왜곡된 인식의 표현으로 보인다. 중요한 것은 나에게 생명을 내준 그것들에 깊이 감사하면서 나 또한 다른 이들에게 기꺼이 내 생명을 내주고자 하는 마음이다. 우리가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을 자식에게 되돌려주듯이, 물이 끝없이 아래로 흘러가듯이 자연스럽게.

나는 성호를 긋고 속으로 이렇게 기도하면서 지금도 여전히 닭을 잡는다. 

‘하느님. 불쌍한 이 영혼을 따뜻하게 받아주시고, 저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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