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규 시인
‘세상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 는 『생명평화결사』의 중심 슬로건이다. 마찬가지로 바바(우주의식, 지고의식)도 바바의 평화도 나로부터 시작된다. 역으로 세상이 아무리 평화로운들 내가 평화롭지 못하면 평화가 아니며 우주의식이 아무리 사랑과 평화 그 자체라 해도 내가 평화가 아니라면 다 평화가 아니다. 이것이 ‘내’가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그렇다고 세상이 평화롭지 못한데 나만 평화로우면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이기주의에 다름 아니며 반야(般若)의 반대편에 있는 무명의 어리석음이다. 세상이 모든 사물과 생명들이 어우러져 ‘하나’로 굴러간다는 것은, 이제는 붓다의 ‘연기(緣起)’를 들먹이지 않아도 대부분 공감하는 진리로 인식되고 있다. 그래서 다시 말하면 세상의 평화는 모든 생명들 하나하나의 평화로부터 시작된다. 나는 너와 동등하게 연동되는 공동 운명체인 것이다.

나의 평화, 가족의 평화, 나라의 평화도 그리고 세상의 평화도 모두 스스로부터 나온다. 남한의 뜻대로만 한다고, 북한의 뜻대로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고 평화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좌익과 우익, 진보와 보수, 야당과 여당, 남과 여, 선과 악, 등 모든 대립과 갈등의 이원론적 구도와 본질은 사실 동양의 많은 경전급의 책에 나오듯이 ‘음양’의 진리에 닿아 있다. 그리고 그 대립과 갈등은 어느 하나의 극대화에 의해 상쇄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잘 조화를 이루는데 그 상생의 비밀이 있다.

좀 더 말하면 ‘음양’의 진리가 그렇듯이 ‘나’는 ‘너’에 의해 그리고 ‘너’는 ‘나’에 의해 서로의 ‘하나 된 어울림’ 그 자체가 평화라는 말이다. 현재까지의 인류사 전체를 놓고 보아도 우리 인류가 누렸던 평화는 전체 기간의 10%도 되지 않을 것이다. 아니 그것도 물리적인 폭력으로 만든 잠깐의 평화적 구도였을 뿐 평화의 본질에는 닿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머릿속에 그려져 있는 평화라는 것은 동일한 한가지의 색으로 칠해진 것일 뿐 나 자신, 개인에까지 미치는 평화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진정한 나와 모두의 평화는 나와 모두의 다양하고 디테일한 어울림 속에서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평화를 갈망하는 현재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바 의식이다. 우주적 의식은 허황한 것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 스스로가 우주의 한 편린이고, 그래서 우주 그 자체라는 팩트의식을 조금씩 스스로 키워낼 수 있다면 에고가 순순해지고 스스로 참된 존재의 본성, 삶의 본성을 조금씩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은 ‘존재의 본성’을 찾는다고 깊은 산 속에 들어가 명상을 하고 수련을 하지만, 사실 내 안에 있는 그 ‘존재의 본성’은 ‘나’와 ‘너’가 있는 저자거리에서 찾아야 하며 명상은 ‘지금 여기’를 위해 있는 것이다.

개인의 의식이 확장되고 나아가 사회의 의식이 확장되면 반드시 전체의식의 점핑이 온다. 감이 익으면 떨어지는 이치와도 같은 것이다. 이러한 상태가 되면 ‘어울림 삶’은 저절로 이루어지며 대립과 갈등은 ‘음양의 조화로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한 나의 평화, 가족의 평화, 국가의 평화, 지구의 평화는 어떤 세상적인 제도의 개혁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우주의식의 인식과 함께 가야만 한다. 세상의 제도라는 것은 칼자루와 같아서 선인이 잡으면 좋은 요리를 만들어내지만, 악인이 잡으면 살인을 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주의식, 그 바바의 평화는 이미 내 안에 존재하고 있으나 우리가 무지 무명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인지하지 못하며 나의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미 태어날 때부터 황금 독수리로 태어났으나, 사는 동안 날갯짓도 제대로 못하는 닭으로 살다가 닭이라는 이름으로 죽어가는 것일 뿐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의식’의 확장이 필요하다. 바바의 의식, 바바의 평화는 이미 내 안에 있건만 나는 또 어디를 가려고 운동화 끈을 조여 매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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