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수현
    순천여고 교사
가까운 땅에서 숨결과 같이 일어나는 봄과 달리 가을은 머나먼 하늘에서 차가운 물결과 같이 밀려온다. 가을은 우리의 입술을 다물게 하고, 별을 생각으로 깎고 다듬어 언어의 뼈마디를 고르게 한다.
 - 김현승, ‘가을’ -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서늘한 바람과 맑고 카랑카랑한 햇살이 가슴 깊은 곳에 있는 슬픔의 현을 건드린다. 야비하고 치졸한 언사로 더러워진 귀를 풀벌레 소리로 씻고, 신물 나는 작태로 오염된 눈을 투명한 달빛으로 씻어야 할 때이다. 텅 빈 가슴을 가을의 서정으로 채워야 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가을을 국어 교과서에서 처음 만났다.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로 시작하는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와 “주여, 때가 왔습니다”로 운을 떼는 릴케의 <가을날>은 ‘가을 시의 원형’으로 우리의 영혼에 남아 있다. 가을은 모든 욕망이 불타고 난 뒤, 겸허한 심정으로 절대자에게 무릎 꿇고 무언가를 간구해야 하는 시간이라는 이미지는 그때 형성되었다. 그런데 세월의 더께가 쌓이면서 ‘가을의 시와 노래’가 늘어났다.

바람이 서늘도 하여 뜰 앞에 나섰더니
서산머리에 하늘은 구름을 벗어나고
산뜻한 초사흘 달이 별 함께 나오더라 
달은 넘어가고 별만 서로 반짝인다
저 별은 뉘 별이며 내 별 또 어느 게요
잠자코 홀로서서 별을 헤어 보노라 
 - 이병기, ‘별’ -

가을하늘처럼 높고 맑은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청소년기로 돌아간다. 그 때는 별을 헤던 시절이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 윤동주, ‘별헤는 밤’ -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에서 문득 목이 멘다. 그게 사실의 표현이라면 티 없이 맑고 순수했던 그 시절이 그리워서 서럽고, 반어적이라면 별처럼 수많았던 번민이 떠올라 가슴 아프다.

가을엔 편지를 하겠어요
누구라도 그대가 되어 받아 주세요
낙엽이 쌓이는 날
외로운 여자가 아름다워요 
 - 고은, ‘가을 편지’ -

밤새 수신자 없는 편지를 썼다가 아침에 버리는 낯 뜨거운 일을 반복하기도 했다.

30대쯤에 한시(漢詩)가 눈에 들어왔다. 가을밤의 사무치는 그리움을 노래한 이백의 <추풍사(秋風詞)>, <자야오가(子夜吳歌)>, <옥계원(玉階怨)>과 왕유의 <늦가을 산장에서[山居秋暝]>를 만났다. 늙고 병든 말년에 무상한 인생의 감회를 읊은 두보의 <추흥(秋興)>과 <등고(登高)>도 좋았다. <등고> 미련(尾聯)의 그 도저한 쓸쓸은 압권이었다. 늙고 쇠약해져 이제 술마저 마실 수 없다니!

『고문진보』에서 만난 한무제의 <추풍사(秋風辭)>와 구양수의 <추성부(秋聲賦)>는 감동이었다. <추풍사>는 인생무상과 늙음을 한탄하고 있다. 소재는 추풍, 낙엽, 국화 등 평범하고 글은 짧지만 절대 권력자의 인간적인 모습이 마음을 움직인다. “환락이 지극하니 슬픔이 짙어지네”(歡樂極兮哀情多)는 명구(名句)다.

“구양자가 밤에 책을 읽으려다가 서남쪽에서 오는 소리를 들었다”로 시작되는 <추성부>는 가슴을 흔든다. 동자(童子)와의 문답으로 구성된 <추성부>는 문학성이 짙은 작품이다. 가을 밤 바람소리를 들으며 펼치는 상상의 세계가 실감나게 형상화되어 있다. 왜 가을이 되면 낙엽이 지고, 우울해지는지 이 작품을 통해 알았다. 가을은 형관(刑官)-음(陰)-병상(兵象)-금(金)-의기(義氣)-살(殺)-실(實)-상성(商聲)-서방(西方)-이칙(夷則)-7월-노(老)-비상(悲傷)과 연관돼 있기 때문이었다.

서양의 가을밤이 슈베르트의 세레나데처럼 깊어진다면, 중국의 밤은 두보(杜甫)의 시처럼 깊어가고 한국의 가을밤은 시조의 가락처럼 깊어간다(이병주). 사랑의 기쁨을 노래하는 김동규의 <시월의 어느 멋진 날에>도 멋지지만, 깊어가는 가을밤의 <추풍사>는 웅숭깊다. 그리고 가을 등잔불 아래서 읽던 책을 덮고 지난 역사를 회고하는 황현을 떠올리며 절명시 한 구절을 읊조린다.
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저작권자 © 순천광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