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계산은 남도의 명산으로 송광사와 선암사가 있는 불교문화의 중심이며, 순천사람의 주요한 삶의 터전이다. 
순천시 송광면 출신인 김배선 씨는 약 15년 동안 조계산과 그 주변 마을을 누비면서 주민의 이야기를 수집하고 현장을 답사한 자료를 토대로,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라는 책을 냈다.
이 책 주요 내용 중 일부를 김배선 씨의 동의를 받아 순천광장신문 독자들과 함께 공유하기 위해 연재한다. 편집국




극락교

▲ 송광사 청량각의 전경



▲ 김배선 향토사학자
송광사 탐방은 절의 약 400m 앞에 있는 극락교(청량각)에서 시작한다.

극락교(청량각)는 송광사의 대단히 중요한 위치와 뜻을 가지고 있다. 이곳의 지명을 사자목(獅子項)이라고 한다.

이곳에 다리가 놓인 역사를 보자. 조선 영조 6년(1730년. 경술년) 봄 최초로 누각이 없는 석조구름다리를 만들어 이름을 극락교라 하였다. 이후 1853년(철종5년) 7월 5일 밤 홍수로 극락교가 쓸려 내려가 방치된 상태에서 1892년(고종 29년) 5월 5일 사자목 건너편 북쪽 산비탈로 길을 고쳐 만들었다.

위치는 2006년 청량각 앞에서 왼편의 개울을 따라 새로 낸 보행로이다. ‘고쳐 만들었다’고 한 것은 다리가 끊긴 이후 사람들이 산비탈로 다니던 좁은 길을 넓혀 새로운 길을 만든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극락교가 놓이기 전까지는 절을 다니던 길이 이곳이었음을 알려주는 ‘고로’(古路)라는 기록이 『송광사고』에 나온다.

다리가 끊기자 사용하지 않던 길을 재건하여 통행로를 만든 것이 ‘임진개로’이다. 그때를 기념하기 위함이었던지 갈림길(입구)에서 약 60m 지점에 있는 왼쪽 바위에 ‘南無阿彌陀佛’라는 글이 연호와 함께 새겨져 있다. 『송광사지』는 1917년 극락교를 재건하여 개통하고, 비탈길(임진개로)을 폐하였으며, 1923년 여름 극락교 위에 4칸 누각을 세우고 청량각이라 이름 붙였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청량이란 그저 시원하고 깨끗함이란 뜻만 있는 게 아니다. 불교에서 ‘청량’은 문수보살과 통한다. 중국의 오대산에 문수보살을 모셨기 때문에 ‘청량산’이라고 부른다는 것이 ‘청량’에 관한 어원이다.

▲ 극락교 위에 세워진 청량각

절에는 문수전(문수보살)을 모신 곳이 많다. 송광사에도 ‘문수전’이 있다. 조계산의 옛 이름이 ‘청량산’이었던 것을 감암하면 ‘청량각’이란 이름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극락교는 전통 석조 구름다리이며, 다른 다리들보다 높이가 높다. 매표소로부터 50m 위에 있는 극락교는 다리 위에 4간의 누각이 세워져 있는데, 앞에는 누각의 이름인 ‘청량각’으로, 뒤편에는 다리의 이름인 ‘극락교’라는 현판이 각기 상인방 위에 달려 있다.

산골 계곡에 가로놓인 구름다리를 인근 마을 사람들은 행기 다리라고 부른다. 석조 구름다리인 ‘홍교’가 ‘행교’로, ‘행계’로, ‘행기’로 발음이 변한 때문이다.

운치와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고, 이름처럼 계곡 물과 솔바람이 청량함을 자랑하고 있는 이 다리의 특징은 청량각에 있다. 청량각의 좌우 칸칸마다 기둥 사이로 등받이 난간 의자를 만들어 놓았다. 이 난간의 쓰임새는 대중이나 절을 찾는 사람들이 땀을 식히고 지친 다리를 쉬어 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이 자비심의 발로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수 십리 길을 걸어 절을 찾는 사람들이나 등짐을 내려놓고 이곳에서 땀을 식히는 모습은 언제나 평화롭고 아름답기만 하다. 
 

하마비 

송광사 일주문으로 가기 전 70m 지점의 왼쪽 길 옆 언덕에 여느 절에서는 보기 힘든 자그마한 비석 하나가 외롭게 서있다. 선암사에도 일주문 앞 40m 지점의 왼쪽 언덕에 있다.

바로 ‘하마비’이다. 하마비는 ‘수레에서 내리라’는 것을 알린다. 사람들에게는 절대 신성 구역을 알리는 경계의 표시이다.

하마비는 1413년(태종13년) 왕명에 의해 종묘와 궐문 앞에 “大小人員 皆下馬”라고 새긴 경계석을 세우고, 이곳을 지나 안으로 들어 갈 때는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말에서 내리게 하였다. 이것이 하마비의 연원이다.

제왕이라 해도 이곳이 신의 경계임을 존중하여 수레에서 내렸을 것을 생각하면 송광사(선암사)가 성역이었음을 알리고 있다.
 

송광사의 하마비

▲ 송광사 하마비

절의 하마비는 원찰(願刹)과 관련이 있다. 원찰이란 왕실에서 축원을 위해 원당(願堂)을 세운 사찰을 말한다. 그러므로 원당은 궁궐과 가까운 절에 있거나 궁궐 내에다 짓기도 하였다

그러나 궁궐과 먼 사찰의 원당은 그 지방의 큰 절이나 이름난 큰 스님이 있는 곳을 왕실에서 선정하여 봉설(奉設)하는 경우인데, 송광사와 같은 곳이 대표적인 예이다.

송광사에 원당이 들어선 것은 1755년 영조에 의해 ‘육상궁원당’(숙빈 최 씨, 영조의 어머니)을 최초로 1886년(고종 13년) ‘삼전축리원당’(왕과 왕비, 세자)과 1902년(고종 39년) 기로소원당(왕 60세, 제신 70세 이상의 경로)이 차례로 봉설되었다.

지금의 송광사 하마비는 1887년에 세운 것이므로 종묘에 최초의 하마비가 서고, 474년이 지난 뒤이다.
비의 뒤편에 건립과 관련된 내용으로 보이는 글씨가 새겨져 있으나 마멸되어 거의 판독이 불가능 한 것을 송광사 박물관장 고경스님이 ‘광서13’이란 연호를 어렵게 판독하였다. 이는 건립 연대이며 이후의 건립자로 보이는 사람의 이름은 알 수가 없다.

다만 비를 새운 사람이 당시 전라도관찰사로 알려지고 있으므로, 송광사지에 1886년에 이범진이 부임하여 ‘삼전축리원당’”을 세우는데 공헌하였다는 기록이 남겨진 것을 감안하면 그가 유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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