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명훈
예술공간 돈키호테
기획연구팀장
역사적으로 ‘문화(文化)’라는 말은 근대 일본 지식인들이 영어 컬처(culture), 독일어 쿨투어(Kultur)를 번역하여 만든 말이다.

일본학자 야나부 아키라는『한단어 사전, 문화』 (2013, 푸른역사)를 통해 문화라는 단어가 생겨난 배경을 설명하면서 일본이 특히 독일어의 의미를 받아들였다고 했다. 문명은 물질을, 문화는 정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양자가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는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뒤늦게 발전한 독일이 자신들의 우월성을 물질보다는 정신(사상)의 측면에서 역설하고자 고안된 관념이다. 프랑스와 영국에서 볼 때 독일은 후진국일 수밖에 없었다.

한자어 ‘문화’는 ‘문치교화(文治敎化)’의 사자성어를 줄인 말이다. 즉 문화란 인간의 가장 수준 높은 문명의 산물인 문자로 통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문자 교육이 필요하고 교육을 통해 인간이 보다 수준 높은 문화인, 즉 근대적 교양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는 현대어로서 문화가 가지는 의미, 예를 들면 문화는 예술과 함께 짝지어 창의적이며 즐거움을 주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에 비하면 훨씬 정치학의 개념에 가깝다.

근대어로서 문화의 의미를 다시 말하면 문화인이란 물리적 폭력을 사용하기보다, 객관적이고 이성적인 언어와 문자를 사용해 질서를 바로 잡고 타자를 설득하여 함께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인간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어쩌면 문화라는 말이 품고 있는 근대적 의도는 그럴듯하게 들릴 수 있지만 문화 역시 또 다른 유형의 폭력과 파괴를 동반한다는 점에서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다. 계몽의 방법론과 태도에 여러 문제가 지적되듯, 언어폭력이 물리적 폭력보다 더 깊은 상처를 줄 수 있다. 교육을 통해 잘못된 세계관과 시대정신, 가치관을 주입시킬 수 있는 것처럼 문화가 지배와 통치의 핵심수단이 되면 위험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는 우리 민족에게 문화통치와 계몽의 통치철학을 적용했다. 우리가 역사교육을 통해 잘 암기하고 있듯, 3.1운동은 일제가 강압적인 무단통치에서 보다 유연한 문화통치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어 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문화통치는 우리 민족의 고유문화를 말살하고, 감시를 더욱 강화시켰으며 더 내면적인 자기검열을 통해 역사와 시대에 대한 통찰을 왜곡시키려 애섰다. 공동체 내의 분열과 배신은 더 일상화 되었고, 문화통치로 인해 지배 권력에 들러붙은 자들의 자기합리화는 상상을 초월한다.

1970년대에 박정희 유신정권 아래 등장한 ‘민족문화의 창달’이라는 것도 일제시기의 문화통치와 크게 다를 게 없었다.

이명박 정부 이후 문화와 관련한 여러 정책과 사업, 축제와 같은 대형 이벤트가 봇물 터지 듯 등장하고 있다. 문화는 점점 예술과 결별하고 관광과 짝짓고, 돈벌이 또는 사람몰이를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문화민주주의, 문화다양성의 확대보다는 자본과 권력에 친화적이며 그럴듯하게 포장하려는 수준이다. 그리고 소소한 문화생태계를 파괴하는 거대한 이벤트나 시설을 확산하고 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다.

특히 정부나 지차체가 추진하는 문화정책과 사업을 보고 있노라면 공무원들의 문화에 대한 수준이나 인식이 근대기로 퇴행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누구를 위한 것인가? 무엇을 목적으로 하는 것인가? 이 모든 게 현재의 권력과 통치 유지를 위한 몸부림처럼 처절해 보인다.

검열과 감시, 과정보다는 성과중심, 자율적인 참여보다는 군중 동원이 다시 팽배하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문화의 근대성을 고민해 봐야 한다. 이제라도 자신이 원하는 문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을 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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