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전라남도 순천 저전동에서 태어난 남승룡은 보통학교 6학년 때 전라남도 대표로 조선신궁대회에 출전하여 1만m에서 4위, 마라톤에서 2위를 차지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하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진학을 하지 못한 남승룡은 순천공립보통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뒤늦게 상경해 협성실업학교를 다니다 육상명문 양정고보로 전학했다. 이후 후견인의 도움으로 일본 아사부(麻布)상업학교와 메이지(明治)대학을 졸업한 남승룡은 메이지대학 입학 이후 재능을 높이 산 귀족 기다바라케의 후원을 받았고, 1935년 11월 베를린올림픽 파견 대표 선발 예선전에서 4위를 했다. 1위는 손기정이었다. 그러나 이듬해 5월 최종선발전에서 1위를 차지한 남승룡은 손기정과 함께 올림픽 출전권을 따냈다. 1936년 8월 9일 열린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2시간31분32초의 기록으로 동메달을 획득하여 식민지 조국에 무한한 가능성과 희망을 안겼던 남승룡은 손기정과 함께 한국마라톤의 1세대였다. 36세에 출전한 1947년 보스턴마라톤에서는 해방된 조국의 태극기를 달고 당당히 10위를 차지하며 우승자인 서윤복과 함께 마라톤 강국의 자존심을 살렸다.

1996년 가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제패 60주년 기념식 때 후배 육상인들이 손기정의 금메달과 똑같은 모양의 금메달을 제작해 남승룡에게 전달한 뒤 마음속의 빚을 털어버렸지만 1947년 1월부터 1963년 9월까지 대한육상연맹 이사와, 1953년부터 1961년까지 전남대 체육학과 교수를 지낸 것 외에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남승룡은 2001년 2월 20일 서울경찰병원에서 향년 89세로 별세하기까지 앞서 나서는 것을 싫어한 탓에 ‘은둔하는 영웅’으로 불릴 정도로 손기정의 그늘에 가려 세인들의 관심 밖에서 쓸쓸한 여생을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달리는 것은 남승룡 선생의 꿈이었다. 순천공립보통학교(현 순천남초등학교)학생시절 외사촌 형이 운동회에서 일본인들과 경쟁, 마라톤에서 1위를 차지하여 모든 시민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는 것을 보고 마라톤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한 남승룡 선생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시절 서울에서 고향 순천까지 하루에 200리(80km)에서 250리(100km)를 5일간 뛰어 고향 순천에 온 사실도 있었고 부모님의 여수 심부름도 뛰어서 다녀오는 등 달리기를 생활화하고 좋아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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