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요가 수행자의 결혼과 이혼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요? 우리의 주인공 김민우와 함께 인도 요가 스승들의 답을 들어 볼까요?

 

 

▲ 장용창

“리시케시까지 간다고 당신이 말했잖아요?” 김민우는 금방 날릴 듯이 주먹을 들어 버스 차장을 위협했다. 아니, 위협이라기보다 헛된 분노에 불과했다. 뉴델리의 버스 터미널에서 “이 버스 리시케시까지 가요?”라고 김민우가 물었을 때, 버스 차장은 당연하다는 듯 “리시케시? 오케이!”라고 답했다. 그런데, 일곱 시간을 달려 데흐라둔까지 와서야 이 버스는 다른 곳으로 가는 거라면서 리시케시로 가려면 다른 버스를 갈아타라는 것이다. 화를 내봤자 별 수가 없어, 김민우는 뉴델리에서 새로 산 커다란 배낭을 메고 버스에서 내렸다.

이른 3월, 오후의 해가 곧 질 것 같았다. 아직 몇 시간은 남았지만, 숙소를 잡지 못한다면 큰일이었다. 위기 상황에서 김민우는 오히려 침착해지고 상황 판단이 정확하며, 행동이 신속해졌다. 그의 고향 제주도의 바람 부는 벌판과 바다에서 몸으로 익힌 본능이었다. 사람들에게 물어 리시케시로 가는 버스를 탔다. 그제서야 몸에 긴장이 풀리면서 자신의 행동을 되돌아보았다. 인도 사람에게 주먹을 들어 위협한 행동은 정말 위험천만한, 바보같은 짓이었다는 깨달음이 왔다. 이곳은 인도였다. 외국인 여행객에 불과한 그가 만일 정말로 버스 차장을 때렸다가 보복 폭행이라도 당한다면, 그는 경찰의 보호도 거의 받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령 그가 버스 차장을 때렸다 한들 무엇을 얻을 것인가?

감정의 기복이 심하다는 문제도 그가 인도에서 풀고 싶은 문제 중 하나였다. 그가 보기에 제주도의 한주훈 요가 선생은 늘 평정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부러웠다. 도대체 비결이 뭔가? 한주훈 선생은 그냥 ‘요가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1998년 이후 칠년 동안 나름 열심히 요가를 해도 그는 아직 분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비하르 요가 대학에서 걷기 명상을 하고 철학 교수와 신에 대해 얘기할 땐 무슨 대단한 요가 수행자라도 되는 냥 우쭐해졌다가도, 이렇게 버스 차장의 행동에 자극을 받으면 금새 분노로 차오르기도 하는 그였다. “좋게 생각하자. 내가 이 모양 이 꼴이니까 여기 인도까지 왔지.” 스스로에게 말했다. 힘든 상황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그의 장점을 발휘했다.

리시케시의 장엄한 풍경은 그의 마음을 평화롭게 해주었다. 북쪽의 산들은 멀리 히말라야까지 이어졌고, 갠지스 강을 따라 여러 색으로 칠한 아름다운 아쉬람들이 모여 있었다. 갠지스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에서 내려다보니 커다란 물고기들이 떼를 지어 다녔고, 그 물고기들을 사냥하기 위해 곤두박질치는 물수리도 보였다. 모래 강변에선 피부가 하얀 여행객들이 일광욕과 수영을 즐기고, 강변의 계단에선 인도 사람들이 놋그릇에 기름불을 피워 무슨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목욕을 하기도 했다. 길거리에는 아무 데나 앉아 자신만의 만트라(독송) 명상에 잠겨 있는 초라한 옷차림의 수행자들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는 시바난다 아쉬람으로 향했다. 시바난다는 비하르 요가 대학교의 설립자인 사티아난다의 스승이었다. 사티아난다가 시바난다의 열 두 제자 중 한 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시바난다는 또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란 말인가? 시바난다 아쉬람에서도 비하르 요가 대학교에서 찾아왔다는 설명 덕분에 일주일간 머무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짐을 풀고 여기 저기를 둘러보는데, 아쉬람 본관 건물 벽에 커다란 글씨가 눈에 띄었다. Do good. Be good. 우리 말로 하면 “착한 일을 하라. 착한 사람이 되라” 정도로 번역할 수 있는 글이었다. 김민우는 황당함을 느꼈다. “전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요가 스승이라고 하는 시바난다가 남긴 말이 겨우 저거란 말인가? 착하게 살라고? 우리 동네 조폭들이 어깨에 문신으로 새기는 말 아닌가?" 그는 이 말의 뜻을 물어보자고 마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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