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두규 시인
산수유 꽃이 피기 시작하는 춘삼월에 태어난 강아지 새끼 한 마리가 벚꽃이 흐드러져 절정에 이른 어느 봄날 나에게 왔다. 뱃속에서 나온 지 한 달 동안 내내 꽃 구렁의 세상을 두리번거렸을 것이니 꽃돌이라 이름 지었다. 나는 스스로의 짐승性을 떨쳐내기도 바쁜 놈이라 개 같은 그런 짐승을 기른다는 건 생각조차 하지 않고 살았는데, 같은 동네 사는 지인이 기어이 길러야 한다고 버리다시피 놓고 가서 이것도 팔자려니 하며 개 닭 보듯 그냥 데리고 있다. 하지만 저 녀석도 불성佛性이 있다는 엄연한 목숨인데 대접이 아니다 싶어 시도 한 편 써 보았다.
 

- 꽃돌이 -

개들은 에고가 없어 도道 닦을 일도 없어. 이미 붓다가 말한 그 무아無我의 경지에 있는 애들이지. 감정을 섞어 한 대 때려도 먹이를 주면 속없이 바로 꼬리를 흔들며 좋다고 달려들어. 그래, 그렇게 존심存心이 없어야 한 세상 걱정 없이 살다 갈 수 있는 거지. 개 팔자가 상팔자라는 거는 말하자면 에고가 없기 때문이야. 10년 도를 닦아도 에고 지우는 사람 별로 없어. 그렇다고 저것들을 도사道士라고 할 수는 없지. 왜냐고? 그것도 결국은 존심存心이 없기 때문이지 뭐야. 정치판이나 학문판이나 예술판이나 그 어느 판에서 아무리 도道 잘 닦은 도사道士라도 권력이나 돈 앞에서 알랑거리는 것들은 다 짜가잖아. 개 팔자를 타고난 것들에게 무슨. 아, 갑자기 존심存心 상하네.


나는 집 마당도 넓고 해서 그냥 놓아기르기로 했다. 저도 답답하지 않고 나도 신경 쓸 일 없이 때 되면 밥만 주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처럼 강한 에고가 없기 때문에 웬만한 일에 섭섭해 하거나 슬퍼하거나 절망하는 일도 없을 것이니 밥만 굶기지 않고 적당히 있는 듯 없는 듯 살면 되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녀석이 너무 어려서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어미는 없고 나한테 너무 목을 맨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혼자 살며 주말에는 아내에게 다니러 가야 하기 때문에 꽃돌이는 나 아니면 돌볼 사람이 없어 늘 혼자 놀아야 했다. 주중에 같이 있을 때에도 나는 원고에 매달려 있어야 하고 어쩌다 나가는 것은 예초기로 풀을 깎거나 텃밭 일을 하기 위해서니 저하고 놀아 줄 일이 별로 없었다. 목줄을 안 했으니 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혼자 놀았으면 하는데 내가 안에 있을 때면 문 앞에서 낑낑대고 나가면 정신없이 달려들어 반가워하며 졸졸졸 따라다니니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비가 와서 땅이 젖은 날에는 젖은 발로 나에게 달려드니 옷이 엉망이 되어 밖에 나가기가 꺼려졌고, 툇마루도 그 녀석 차지가 되어 온통 더럽혀져 있어서 툇마루에 앉아 먼산바라기를 하는 즐거움도 없어졌다. 게다가 텃밭 일을 하면 따라다니며 밭의 작물을 온통 짓밟고 다니니 점점 성가시고 귀찮은 존재가 되어 갔다.  

내가 몇 년 동안 공들여 가꾸어낸 일상의 평화가 깨지고 있는 것이었다. 아내의 지청구를 들어가며 억지로 이 집을 지었고 작년에 맘먹고 명퇴도 해서 이 두텁나루숲의 공간을 나름대로 즐길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게 무슨 변이란 말인가. 

꽃돌이가 요즘 명상의 화두가 되면서 새삼 실감나게 느끼는 것이 있다. 아이든 아내든 친구든 손님이든 애인이든 강아지든 한 생명을 모신다는 것은 스스로를 그만큼 내려놓지 않고서는 도대체 해볼 도리가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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